빛나거나 연기가 나거나(1)
빛나거나 연기가 나거나(1)
  •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5.03.22 1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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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빨간 우체통을 보며 마음 설레던 이야기는 이제 더 이상 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다. 우리는 흔히 말하는 정보화시대, 정보 전쟁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요즘은 컴퓨터나 스마트폰을 이용하여 문자메시지와 정보를 주고받고 있다. 안방에 앉아 외국에 있는 사람과 화상통화를 한다. 

또 언제든 위성통신을 통해서 적의 침략과 국가의 위기는 물론 지구 상의 작은 움직임도 쉽게 알아낼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러면 고대의 통신수단으로는 무엇이 있었을까. 먼 옛날 이 땅에 살았던 우리 선조들도 먼 거리에서 위험 유무를 가장 빠르게 알릴 수 있는 통신 수단을 고민해 왔다. 그래서 탄생한 것이 바로 봉수이고 전화가 발명되기까지 여러 가지 통신방법이 있었지만 그중에 가장 오래된 것이 봉수였다. 

봉수는 외부로부터 위험을 알리기 위해 산봉우리에서 불이나 연기를 이용해 사전에 서로 약속한 신호로 연락하는 것이다. 그래서 봉수꾼이 봉수대 근처에 기거하면서 전국에서 전해져오는 신호를 알리는 중요한 의미를 지닌 이동통신 수단이 봉수였다. 

만약 연기를 피울 수 없는 상황이면 말(馬)을 이용하여 다음 봉수대에 소식을 알렸다고 한다. 봉화를 올릴 수 있는 봉수대는 오늘날로 치자면 통신사 중계소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옛날의 통신수단으로 봉수와 우역, 그리고 파발이 있었다. 봉수는 외부로부터 위험을 알리기 위한 통신 수단이다. 우역이란 옛날 공문서의 전달이나 관물(官物)의 운송, 공무를 띤 출장관리의 숙박 편의를 위해 설치한 국가의 육상 통신, 교통기관을 말한다. 파발은 말을 타고 연락하는 것인데 파발에는 기발과 사람이 속보로 걸어서 연락하는 보발이 있었다. 

봉수의 종류는 전국의 모든 봉수가 집결하는 중앙봉수로 서울 목멱산(지금의 남산)에 위치한 경봉수, 국경선이나 해륙 변경의 제일선에 설치된 연변봉수가 있고 경봉수와 연변봉수를 연결하는 내지봉수(육지의 봉우리를 연결) 세 종류가 있었다.

봉(烽)이란 밤에 불빛으로 알리는 봉화(烽火)를 말하며 홰(炬)에 불을 켜서 알리는 것으로 싸리나무에 관솔을 넣어 만들었다. 수(燧)란 낮에는 나무에 불을 피워 그 연기를 서로 바라보게 하는 방법인데 섶나무를 태워 그 위에 소나 말 등 짐승의 배설물을 섞어 태웠다. 

그러니까 봉수대는 횃불과 연기를 이용하여 급한 소식을 전하던 옛날의 통신수단을 말하며 높은 산에 올라가서 불을 피워 낮에는 연기로, 밤에는 불빛(횃불)으로 신호를 보냈다. 다시 말하면 고려시대부터 설치되어 1894년 폐지될 때까지 변방의 긴급한 소식을 불빛이나 연기로 알렸던 것이다.

평상시에는 1홰, 적군이 나타나면 2홰, 국경에 접근하면 3홰, 국경을 침범하면 4홰, 전투가 벌어지면 5개의 홰를 올렸다. 

것대산 봉수는 조선시대 전국적인 봉수망 가운데 제2거(炬) 봉수 노선에 딸린 간봉(間烽)이다. 경남 남해의 금산(錦山)에서 시작하여 진주 대방산(臺方山)을 거쳐 회덕 계족산(鷄足山), 문의 소이산(所伊山)을 경유하여 이곳 청주 것대산 봉수에 이르게 된다. 

이곳에서 북쪽으로 진천 소을산(所乙山)으로 해서 충주(지금의 음성) 망이산성(望夷山城)으로 이어지고 망이산성 봉수에서는 동래에서 출발한 제2거 직봉(直烽) 노선을 받아 서울 목멱산 제2봉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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