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 문학인들
문학과 문학인들
  • 최 준 <시인>
  • 승인 2015.03.19 1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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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 앞에서

최 준 <시인>

고등학생이던 청소년 시절 글을 써보겠다고 마음먹었을 때 문학반을 담당하셨던 시인 선생님이 하신 말씀을 잊을 수 없다. 선생님은 재래시장 모퉁이의 국밥집에서 순대국밥을 사 주시면서 앞으로 가난하게 살게 될 거라고 하셨다. 가난한 삶을 감수할 용기가 있느냐는 뜻이었을 텐데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내심으로는 수긍하지 않았었다. 글을 쓰는 게 왜 가난한 삶을 담보로 해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었다. 

시인이라는 명패를 받은 지 올해로 만 30년이 되어 돌아보니 선생님의 말씀이 새삼스럽다. 가난의 굴레로부터 온전히 벗어나 본 적이 없었음은 물론 자존심과 오기와 치기로 일관해 온 지난날이 후회스럽다. 문학을 같이한다고 어렵기 마찬가지인 서로의 처지를 위무해주는 몇몇 친구들이 유일한 재산이다. 오직 문학이라는 무기력한 명분 하나로 현실을 더불어 버텨가는 친구들의 열정이 고맙고 존경스럽기까지 하다.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지만 이건 다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의 얘기다. 

문학의 자장 밖에서 살아가는 이들은 잘 모르시겠지만 이 땅에는 소위 문학인들이 차고 넘친다. 중앙과 지방의 크고 작은 문학인 단체들은 또 얼마나 많은가. 현실적인 아무런 영향력도 갖지 못하면서 비 온 뒤 잠시 고여 있다가 곧 사라지고 말 세상 뒤편의 웅덩이 그늘 아래 모여 오글거린다. 문학인들끼리 위안 주고 위안 받으면서 문학의 끈을 놓지 않으려는 눈물겨운 노력들을 지속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단체 구성원들 사이에 상충되는 이해관계들이 생겨 다툼으로까지 이어지는 경우가 있다. 그게 문학 자체에 대한 문제에서 비롯되는 것이라면 얘기가 다르다. 이는 문학 단체를 만들고 모임을 갖는 본질적이자 궁극적인 필요성에 해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작 문제는 대부분이 문학 외적인 원인에서 기인한다는 것이다. 염불보다 잿밥에 더 집착하고 자리에 연연하는 추한 모습들을 보게 된다. 문학에 발을 들여놓으면서부터 그러지는 않았을 텐데 문학 판에다 아주 못된 사회의 습속을 끌어들이는 이상한 사람들 말이다.

무슨 큰 권력이나 이권이 있는 자리도 아닌데 명함에다 한 줄 새겨가지고 다니면서 마치 이 땅의 문학을 위해 한 몸 기꺼이 헌신하는 양 위선을 떠는 모습들을 보면 토악질이 난다. 문학인으로서 정치하는 자들에게 제대로 된 훈계나 일침을 가하기는커녕 그들의 무릎 위에 앉아 아양을 떨고 뭔가 생기기를 바라는 어린애들 같은 연장자들이 곳곳에 포진하고 있다. 

그들에게는 판에 박은 듯한 공통점이 있는데 정치꾼들처럼 반성을 모르고 문학하는 것을 액세서리나 훈장처럼 이마에 붙이고 다닌다는 것이다. 치열한 문학 정신은 눈을 씻고 봐도 찾아볼 수 없다. 정작 문학에 단 한 번뿐인 자신의 일생을 거는 이들은 외롭고 힘든 자신과의 싸움에 바쁘고 지쳐서 그런 허망한 자리다툼에는 눈길도 주지 않는다. 

착각하면 안 된다. 문학은 문명이나 과학처럼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당대는 늘 변화의 한 자리에 놓여 있을 뿐이다. 그들 대부분은 정치꾼들이 그러는 것처럼 변화를 거부하고 현재를 고집스레 유지하려는 속성을 지니고 있다. 역동하지 않고 고여 있는 물은 쉽게 썩는다. 썩은 물에서는 사람에게 해가 되는 해충들만 번식한다.

궁극적으로 문학은 혼자만의 일생 과제다. 모임을 만들었으면 그건 문학이 전제되어야 하고 순수가 전제되어야 하고 문학적인 노력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 밖의 것들은 거기에 끼어들어서는 안 된다. 정치꾼들의 전유물인 ‘통렬한 반성’이 없이는 문학판도 정치판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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