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판과 비난에 대하여
비판과 비난에 대하여
  • 김기원 <편집위원·청주대 겸임교수>
  • 승인 2015.03.18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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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편집위원·청주대 겸임교수>

비판과 비난은 이란성 쌍둥이다. 둘은 비슷해 사람들을 헷갈리게 하지만 서로 다른 정체성을 갖고 있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비판과 비난의 경계가 모호한 언사를 한다. 혹자는 들어서 기분 나쁘면 비난이고, 들을만하면 비판이라 여긴다. 

그렇지 않다. 쓴말은 약이 되고, 오히려 단말이 독이 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비판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여 밝히거나 잘못된 점을 지적함. 또는 사물을 분석하여 각각의 의미와 가치를 인정하고, 전체 의미와의 관계를 분명히 규명하는 행위를 이른다. 유의어로 비평, 판단, 평 등이 있다. 

비난의 사전적 의미는 남의 잘못이나 결점을 책잡아서 나쁘게 말함, 터무니없이 사실과 전혀 맞지 않게 헐뜯음이다. 유의어로 인신공격, 지탄, 책망 등이 있다. 

이처럼 비판에는 긍정의 기운이 들어 있고, 비난에는 부정의 에너지가 흐른다. 그러므로 비판은 가까이 하면 자신을 성장시키는 자양분이 되고, 비난은 가까이 하면 자신을 추락시키는 암 덩어리가 된다. 

비판이 살아있는 사회는 건강한 사회다. 올곧은 비판은 사람과 세상을 개조하고, 보다 나은 미래를 가능하게 한다.

비난이 횡횡하는 사회는 암울한 사회다. 비난은 더 큰 비난을 낳고, 하면 할수록 눈덩이처럼 커져 끝내 서로를 옥죄는 부메랑이 되어 삶과 세상을 피폐케 한다. 

조물주는 인간에게 비판의 은사를 주어 만물의 영장이 되게 했고, 동시에 비난이라는 몹쓸 병도 주어 인간의 추함을 드러나게 했다.

남의 사상과 이론, 작품이나 언행들을 비판하려면 부단히 공부를 하고 내공을 쌓아야 한다. 정확히 알아야 옳은 비판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판을 위한 비판은 진정한 비판이 아니다. 잘 알지도 못하고, 대안도 없는 비난성 비판은 상대를 흠집만 낼뿐 개선과 상생의 도구가 되지 못한다.

한국의 정치판이 아직도 그 모양인지라, 부끄럽고 답답하다. 입만 열면 남을 흉보고, 탓하고, 욕하는 사람들이 있다. 아니 그런 사람들이 우후죽순으로 늘어나고 있어 우리 사회의 미래가 참으로 걱정스럽다.

자신이 그리하면 남도 자신에게 그리할 거라는 이치를 아는지 모르는지, 마치 비난하기 위해 이 땅에 온 사람처럼 설쳐댄다. 

‘똥 묻은 개가 겨 묻은 개 나무란다’는 속담이 있다. 자신의 허물은 못 보면서, 남의 허물만 탓하고 흉보는 그런 개 같은 사람이 되지 않도록 수신하고 제가해야 한다.

예로부터 침묵은 금이라 했다. 비난은 분명 공해다. 진정어린 비판이 아니면 차라리 침묵함이 자신을 위해서나 남을 위해 좋다.

조선 영조 때의 학자 김천택이 편찬한 시조집 청구영언에 ‘말하기 좋다 하고 남의 말을 말을 것이/ 남의 말 내 하면 남도 내 말 하는 것이/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라는 작자 미상의 시조가 수록되어 있다.

‘말로써 말 많으니 말 말을까 하노라’라는 명구는 비난의 속성과 설화를 에둘러 노래한 기막힌 절창이다. 

이쯤에서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도 무시로 남을 비난하고 사는가, 남의 비난에 상처받고 있는가?

그대에게 가끔씩 쓴 소리를 해주는 진정어린 비판자가 있는가, 아니면 듣기 좋은 말만 골라서 하는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사는가?

진정어린 비판자가 옆에 있다면, 여태껏 비난을 모르고 살았다면 당신은 진정 복 인이다. 부디 그대만은 비난에 당당하고, 비판에 겸허해지는 멋진 사람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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