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낱같은 희망
실낱같은 희망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5.03.15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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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수안 <수필가>

깡마른 체구에도 그는 20㎏의 거름자루를 거침없이 들어 올린다. 기름기라고는 없는 주름이 자글자글한 목덜미가 자꾸만 눈에 들어온다. 내 옆구리 살로 손이 간다. 겨울 동안 체중이 늘어 한층 더 두툼해진 지방층이 손에 꽉 차게 잡힌다. 기름이 넘치는 내가 여자라는 이유로 우두커니 서 있자니 겸연쩍다. 운반기에 가득 실을 때까지 쉼 없이 하는 그의 말을 잘 들어주는 것으로 미안함을 무마해본다.

“남한 정부가 고맙고 인민이 고맙지요. 덕분에 북에 있는 식구들까지 잘 살게 됐어요.”

탈북한지 3년 되었다는 그는 열심히 일해 번 돈을 북의 가족에게 보낸다고 했다. 어떻게 보내느냐고 했더니 말하기 좋아하는 그는 으쓱하며 그 방법을 이야기했다. 

함경도 두만강 근처가 본가인 그는 북한을 자유롭게 드나드는 중국 브로커의 도움을 받는다. 브로커는 강폭이 좁은 두만강 근처 숲에서 그의 가족과 접선한다. 중국 땅이나 다름없는 거기서는 남한에 있는 사람과 통화가 가능하다. 그의 가족은 브로커의 핸드폰으로 남쪽의 가장과 통화한다. 남쪽의 가장은 얼마의 돈을 보내겠다고 가족에게 알려준다. 브로커는 그 자리에서 수수료를 뗀 현금을 가족에게 전한다. 남쪽의 가장은 통화를 마치는 즉시 브로커의 통장으로 약속한 금액을 입금한다. 북의 가족은 한동안 배불리 먹을 수 있다.

가족을 위해 목숨 걸고 탈북을 감행한 가장, 그의 표정에는 굶주림의 공포로부터 가족을 구한 자긍심이 역력했다. 

그가 탈북하던 때는 몇 년째 먹을 것이 없어 굶어 죽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도 굶주림에 허덕이다 달이 없는 캄캄한 어느 밤에 조그마한 칼을 들고 남몰래 집을 나섰다. 삼엄하게 경비하는 보초를 피해 옥수수밭으로 잠입했다. 톱질하듯 그러나 소리가 나지 않게 살살 칼질해서 옥수수자루를 땄다. 생옥수수로 배를 채운 다음 몰래 밭을 빠져나왔다. 가족을 위해 한두자루 들고 오는 건 마음뿐이었다. 들키면 된통 옥살이를 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 와중에 이웃 사람들이 굶어 죽었고 관도 없는 시신을 수습해야 했다. 그는 탈북을 결심했다.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지만 가만있다가는 온 식구가 굶어 죽을 거라는 공포가 용기를 내게 했다.

그는 두만강이 꽁꽁 언 한겨울 밤에 중국으로 넘어갔다고 한다. 강을 낀 국경에는 100m에 두명씩 보초가 있다. 발각되면 그 자리에서 총살 당하거나 잡혀서 고된 옥살이를 해야 하는 위험한 일이었다. 얼핏 보기에는 초라하기 그지없는 겉모습. 그러나 그는 가족을 위해서라면 생명까지도 내놓을 수 있는 용기 있는 가장이다. 

이제 그는 북의 가족이 잘 살고 있다는 믿음으로 행복하다. 그러나 가족을 향한 그리움이 차오르면 소줏잔을 기울인다. 분단의 아픔, 통일의 염원을 담은 술잔을 기울이며 그리움을 달래는 것이다. 여섯살짜리 손자는 얼마나 잘 크는지, 아들·딸들은 여전한 모습인지, 그리고 조강지처는 어찌 지내는지…. 그래서 그는 브로커에게 스마트폰을 사 주기로 작정했다. 사진이나 동영상으로나마 가족을 만날 날이 머지않았다며 웃는 얼굴에 주름이 깊다.

“그나저나 죽기 전에 통일이 오기나 할까요?”

애매한 미소를 짓는 얼굴에 실낱같은 희망이 안쓰럽게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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