쓴 맛의 운명
쓴 맛의 운명
  • 박숙희 <문화관광해설사·아동문학가>
  • 승인 2015.03.15 20:1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박숙희 <문화관광해설사·아동문학가>

마음의 문을 열고 더 자세히 직지 책 속에 오묘한 이치를, 가진 것 없이 줄 수 있는 삶으로 반추하려는, 그 서른 번째 이야기는 「직지」하권 22장 고령 선사(古靈 禪師)께서 깨달은 말씀이다. 전문적인 이해를 돕기 위해 부산 화엄사 주지 각성 스님의 ‘직지’번역 및 강해(1998년) 등을 참조했음을 밝힌다.

고령 선사가 행각할 때에 백장 선사를 만나 도를 깨닫고 그 뒤에 문득 복주 대중사에 돌아왔는데 은사 스님이 묻기를 “네가 나를 떠나 밖에 있어서 어떤 일을 얻었었느냐?”고령 선사가 답하기를 “아무것도 없습니다.” 은사 스님이 드디어 보내어 일을 보도록 하였다.

어느 날 은사 스님이 목욕할 때 고령 선사에게 때를 밀어 달라고 했는데 고령 선사가 등을 만지며 말하기를 “좋은 법당이여! 부처님 영험이 없도다.” 은사 스님이 머리를 돌려서 고령 선사를 보니까 고령 선사가 말하기를 “부처는 비록 영험이 없으나 또한 방광을 능히 하는구나!”

은사 스님이 또 어느 날 밝은 문 밑에서 경을 보고 있었는데 벌이 문종이에 부딪혀서 나아가기를 구하거늘 고령 선사가 그것을 보고 말하기를 “세계가 이렇게 광활한데 즐겨 나가지를 않고 저 옛 종이만 뚫으려고 하느냐?” 은사 스님이 경을 덮어두고 묻기를 “네가 행각할 때 어떤 사람을 만났느냐? 앞뒤로 너를 봄에 말하는 것이 이상하니 나를 위하여 말을 해라” 고령이 자리를 올라가서 백장 문하의 가풍을 들어 말하였다. 

신령스런 빛이 홀로 빛나서/ 6근과 6진을 멀리 벗어났으며/ 그 자체가 드러나서 참되고 항상하여/ 문자에는 구애되지 않는다.// 마음자리는 더러움이 없어서/ 본래 스스로 원만히 이룬 것이니/ 다만 허망한 반연을 떠나면/ 곧 여여한 부처이니라.

불반(佛盤)은 바로 부처님을 모신 법당을 말하는데 고령 선사가 은사 스님의 몸을 불반으로 비유하고 마음자리는 부처님에 비유한 것이다. 그리고 또 경을 볼 적에 벌이 문 밖으로 나가지 못함을 보고 은사 스님을 벌에 비유한 것이다. 열려진 문으로 나가지 않고 봉창을 뚫어서 문을 통과하려고 하는 벌처럼 은사 스님이 마음을 밝힐 줄을 모르고 경책이나 뒤적거리면서 그것을 뚫어내려고 하니까 어리석다는 것을 빗대어서 말한 것이겠다. 

靈光은 마음자리이다. 공숙영지(空宿靈知)라고 할 때 ‘영지’가 바로 마음의 신령스러운 광명이겠다. 그 마음 광명은 홀로 빛나서 6根, 6진(塵)을 멀리 벗어났기 때문에 이미 문자에는 구애되지 않는 것이란다. 그렇기 때문에 고지(古紙)를 뚫으려고 하는 것은 조금 어긋난 일이라는 것이다. 

不立文字, 문자를 세우지 않는다는 사상과 같이 마음자리는 문자에는 상관없다는 것이다. 心性, 靈光, 體 이 세 가지는 같은 말이겠다.

허망한 반연은 분별심을 말하는데 이 분별심만 떠나게 되면 본래 순수하고 본래 청정한 부처님과 똑같은 자리. 그것이 곧 여여한 부처라는 것이란다.

은사 스님이 고령 선사에게 질문한 “네가 나를 떠나 밖에 있어서 어떤 일을 얻었었느냐?”처럼 인류가 최초로 탄생한 아프리카를 떠나 다른 지역으로 이동해 무엇을 구했기에 같은 영장류인데 인간과 침팬지는 ‘맛’을 느끼는 미각이 다를까? 그 것은 인류가 불을 얻어 쓴 맛을 없애는 요리법을 터득하였기 때문이란다. 이로 인하여 도구와 문화가 발달하고 영장류 가운데, 지구의 지배자가 된 것 아니겠는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