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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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5.03.11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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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연구실의 캐비닛이 문이 닫히지 않는다. 20년 전에 받은 철제 캐비닛이라 요즘 세련된 나무 꼴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게 촌스럽지만 그래도 나와 20년을 함께 한 벗이다. 일그러진 철판에 아픈 흉터도 보인다. 학교에 오면서 받은 것이라고는 책걸상과 캐비닛 하나였다. 전화기가 하나 더 있었고 아무 것도 없었다. 요즘은 신임교수에게 컴퓨터도 마련해주지만 우리 때 그런 배려는 생각지도 못했다. 

캐비닛 안에 뭐가 들어있냐고? 서생의 물건답게 그 안에는 전적으로 내가 쓴 글들이 들어있다. 책과 논문 원본, 논문 별쇄본, 논문 복사본 등이 있다. 그리고 보면 내 가장 중한 보물들이 그곳에 들어있는 셈이다. 내 연구경력이 모두 그 속에 모셔져 있다. 그밖에도 1주일치 식량으로 컵라면, 참치캔 등 생존식품이 책 위에 쌓여있다. 그리고는 급할 때 갈아입을 수 있는 옷과 양말도 들어있다.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두문불출(杜門不出)이 최고다.

캐비닛 밖에는 너절하게 이것저것이 붙어있다. 영화포스터부터 박물관의 그림, 해외에서 보내온 엽서, 스승의 날에 받은 카드, 미국학생이 그려준 나의 몽타주, 써야 할 주제나 제목 등등, 정말 덕지덕지 붙어있다. 포스터에는 레 미레제라블의 아름다운 배우도 있고 티벳의 달라이라마도 있으며 북구 미술관의 크로키 작품도 있다. 학생들의 ‘정, 정말. 세, 쎄! 근, 근데?’라는 내 이름을 갖고 논 이상한 삼행시도 붙어있다. 20년의 역사가 붙어있는 셈이다. 

문이 닫히지 않아 꽝꽝 때리다보니 이것저것이 떨어져 어떤 것은 버리고 어떤 것은 다시 붙여놓았는데 나도 까마득히 잊고 있던 사진이 캐비닛 안쪽에 붙어있는 것을 발견했다. 1993년에 찍은 흑백사진이었다. 어떤 절의 계단에 쭈그리고 앉아 찍은 독사진인데 오래 전의 일을 떠오르게 했다. 

긴 계단 가운데 나는 앉아있고 뒤로는 닫혀있는 문이 있는데 현판에는 ‘진여문’(眞如門)이라고 쓰여 있다. 어느 절인지는 기억도 나지 않는다. 철학을 공부한답시고 진리의 문으로 들어가고 싶은 욕망에 진여문을 배경으로 찍은 것이다. 높고 가파른 계단은 진리의 문이 험난함을 잘 보여준다. 

쭈그리고 앉아있는 내 왼편에는 ‘출입금지’라는 푯말도 붙어있다. 진리를 추구하는 곳으로는 함부로 들어올 일이 아니다. 마음이라도 가다듬고 들어와야 한다. 

이 사진이 원래 붙어있었던 곳은 방문 안쪽이었다. 문밖이 가장 맞겠지만 어차피 마음을 가다듬어야 할 사람은 나고 따라서 내가 늘 보아야 할 장소인 문 안쪽에 이 사진을 붙여놓고 연구실이 곧 절간이라는 다짐을 했다. 

같은 맥락에서 붙어있던 사진은 김대중 대통령이 썼던 청주교도소의 독방 사진이었다. 지방지에 실린 그 사진을 붙여놓은 것은 연구실이 곧 나의 감방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옥살이를 자처하는 것이 서생의 삶이라는 의도였다. 

오래전 학교에서 연구년으로 ‘자발적 유배제도’를 주장했다가 엉뚱한 발상이라고 무산된 적이 있는데 이는 유배야말로 업적을 낼 최상의 기회라는 평소의 의견을 현실에 옮겨보고자 한 것이었다. 다산 정약용도 강진에서, 추사 김정희도 제주도에서 유배하면서 큰 업적을 내지 않았던가. 인문계교수는 안식년을 섬으로 가자는 주장이었다. 

사진 속의 젊은 나는 이제 없다. 진여문도 이제는 나락(落)문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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