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문을 나서는 인문학도들
교문을 나서는 인문학도들
  • 최 준 <시인>
  • 승인 2015.03.05 1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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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 앞에서

최 준 <시인>

학생 몇몇이 졸업을 했다면서 문자 메시지로 인사를 전해 왔다. 재작년에 함께 1년을 공부할 때가 3학년이었으니 다들 졸업생들이다. 대학원에 진학했다는 학생도 있고 취업을 하지 못했다는 학생도 있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발걸음들이 희망적이어야 할 텐데 모두가 학창시절에 대한 그리움으로 점철되어 있다. 

이들의 불안은 학생 신분을 벗어났다는 안도감을 훨씬 뛰어넘는 것이어서 안타깝다. 알게 모르게 많은 보호막이 되어 주었던 학생이라는 이름을 떼어내고 냉철한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 자신이 꿈꾸었던 희망과는 전혀 다른 버거운 현실 앞에서 때 이른 절망감을 느꼈을 수도 있겠다.

문학을 하겠다고 예술대학을 지원한 것이 자신의 결정이었다면 지나온 길이 온전히 노력에 바쳐진 시간이었을 텐데 목표였던 대학 재학 중 등단은 극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꿈을 이루지 못한 채 사회로 떠밀리는 발걸음이 어찌 가벼울 수 있겠는가. 후회도 있을 테고 나태했던 스스로에게 원망도 해 보겠지만 아름다운 추억들도 없지 않았다는 위안도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리라.

학생들의 감사 인사를 받으면서 생각했다. 나는 고마움의 마음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사회 선배로서 아무것도 해준 게 없는 무능한 걸림돌에 지나지 않았음을 절감했다. 이 친구들의 절망에 나는 어떤 위안도 되어주지 못한다는 무력감이 엄습해 왔다. 이들이 헤쳐나가야 할 세상은 절대로 만만하지 않으며 녹록지 않다. 능동이 거세된 수동의 삶이 시작될 테니 그 막막함을 어떤 말로 위무해 주어야 할까.

학생이었을 때는 느끼지 못했던 우리 사회의 부조리들을 발견하는 체험들도 호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자신들이 먼저 알게 되리라. 기성세대가 구축해 놓은 이 세상이라는 게 기실은 모순과 문제들로 가득한 허상이었다는 것을 말이다. 학창 시절이 미래의 사회인으로서 준비하는 기간이었다면 최소한 그들이 설 자리는 마련해 주어야 하는 게 응당한 도리가 아닌가. 그들을 온전한 사회인으로 자신의 역할을 할 수 있게끔 껴안아 주어야 하는 게 아닌가.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면서도 인문학을 공부한 이들은 정작 설 자리가 없다. 실용적인 학문을 경시하자는 게 아니다. 삶에 필요한 것도 있어야 마땅하다. 진정으로 행복한 삶은 몸과 마음이 두루 편해야 한다. 우리는 몸의 편리를 얻은 대신에 마음의 평화를 잊어버렸다. 경제논리에 휩쓸려서 인정을 내팽개쳤다. 상황이 이 지경인데도 못된 정치꾼들은 여전히 국민소득을 언급하면서 정작 심각한 인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 머리만 있지 가슴이 없는 이들에 의해 움직이는 사회가 제대로 굴러갈 리 없다. 세계 11위의 경제 대국임을 자랑하면서 삶의 질과 경제가 마치 비례하는 것인 양 위선을 일삼고 허세를 떠는 모습들이 역겹다.

대학에서 인문학을 공부하고 사회로 나서는 학생들이 불쌍하다. 그들이 설 자리가 없는 현실이 불행하다. 우리 사회는 대체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인가. 아귀다툼으로 일관하는 이 그악한 현실이 개선될 날은 언제인가. 그런 날이 오기는 오는 것인가. 돈보다 더 중요한 인간학이 우리의 마음 안에서 움직이는 인정스러운 봄날을 졸업한 학생들에게 선사하고 싶다. 그들의 마음 안에서 아름다운 꽃 한 송이 피어날 순간을 학수고대한다. 용기와 의지를 잃지 말기를, 세상은 아직도 그대들을 필요로 하고 있다는 것을 그대들이 먼저 알게 되기를 진정으로 빌고 또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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