답청(踏靑)을 기다리며
답청(踏靑)을 기다리며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5.03.03 19: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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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오후.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이 따사롭다. 유혹에 끌려 미뤄두었던 수건을 삶아 널고 창을 활짝 연다. 매운바람이 와락 밀려든다. 나도 모르게 움칫 한걸음 물러선다. 코끝이 시려 눈물이 핑 돈다. 바람에 수건을 걸어둔 옷걸이의 툭 툭 부딪는 소리가 리듬을 탄다. 마음을 햇볕에 넌 듯 가볍다. 

삼월 뒤에 서면 칼바람 앞에서도 당당해진다. 남녘에서 올라온 눈 소식에도 ‘봄’ 자가 붙으니 포근하고, 추위도 예쁜 꽃샘이 붙어 싫어할 수가 없다. 눈 소식 뒤에 따라온 마늘 밭 농부의 손길도 바쁘다. 웃자란 싹들을 비닐 밖으로 꺼낸 뒤 마늘모 주변을 정성스레 토닥여준다. 마치 막둥이 엉덩이를 두드리듯 사랑이 담뿍 담겼다. 푸르고 여린 싹들이 바람에 하늘거린다. 

이맘때면 보리도 흙이 들뜨지 않도록 꼭 꼭 다독여주어야 뿌리에 바람이 들지 않는다. 토요일 일과가 끝나면 보리밟기는 학교 행사였다. 교복을 입은 채 먼 길을 행군하듯 걸어가면 황량한 들판 가운데서 파릇 파릇 보리싹이 반겼다. 처음엔 푸른 싹을 밟는 일이 미안하고 내키지 않아 살살 걸었던 기억이다. 지나간 자리를 되돌아보면 내 운동화 자국위로 언제 그랬냐는 듯 보리는 몸을 곧추세웠다. 긴 겨울 뒤 처음 만나는 생경한 초록빛은 희망처럼 마음을 설레게 했다. 친구들과 양손을 잡고 긴 보리밭을 밟아 나가며 꼿꼿한 삶을 닮아야지 새 다짐을 했던 것도 같다. 수다를 떨며 보리를 밟던 단발머리 친구들은 지금 어디에서 어떤 모습으로 삼월을 열고 있을까? 

삼월을 경계로 고요하던 마음이 꼬물꼬물 가려워진다. 몸을 단단하게 추스르지 않으면 봄날도 꿈이려니. 이런 저런 검사로 황폐해진 몸을 다독이며 허술한 삶을 다져야 하리. 한동안 멀리했던 뒷동산 걷기를 다시 시작해봐야겠다. 곧 필 생강나무 꽃도 산수유도 진달래도 미리 마중해봐야지. 

서울로 떠난 작은아이의 흔적, 바람이 스며드는 마음자리도 꼭꼭 밟아 단단히 마감을 해야 한다. 보리를 밟듯 그리 정성스레 들뜬 삶을 다지고 단단해져야 푸른 들판을 걷는 답청(踏靑)을 즐길 수 있으리. 이슬에 젖은 풀잎위를 맨발로 걸어보는 기쁨. 촉촉하고 부드럽게 살갗으로 스며드는 푸름의 기운이 그립다. 

햇살의 온기가 천천히 식어갈 무렵 소식을 받는다. 세월호 인양을 호소하며 1인시위를 하고 있는 후배의 모습이 마음을 아프게 한다. 몸이 자신 없어 선뜻 함께 하지 못한 일이 내내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래도 이 봄날. 매운바람 속에서 세상을 향해 목소리를 내주는 작은 행동들이 탐욕으로 물든 세상을 다지는 발길임을 안다. 감사와 미안함을 마음에 담아둔 채 아무 말도 전하지 못한다. 후배처럼 어디선가 정의를 위해 온 몸을 다해 세상을 살아내는 풀들이 다져놓은 세상. 나도 풀이 되고 싶다. 

삼월. 어디선가 천천히 오고 있을 푸른 그날. 맨발로 걸어도 좋을 그 날을 기다리며 몸과 마음을 다독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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