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결핍을 위하여
너의 결핍을 위하여
  • 임정숙 <수필가>
  • 승인 2015.03.02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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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정숙 <수필가>

군대 간 아들 녀석이 얼마 전 전화에다 “엄마 이젠 차 좀 바꾸세요.” 하며 응석 부리는 소리를 한다. 지난번 아들 면회 갈 때 제 여자 친구를 태우고 간 엄마의 오래된 차가 내심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다. 여자 친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아들의 자존심이 헤아려진다. 

단지, 더 괜찮은 승용차로 해결하지 못해서가 아니다. 그것이 무엇이든 보호해 줄 자식에게 채워주지 못하는 어떤 한계에 설 때는 비 맞은 어미 새가 된다. 

문득 우리 사무실에 잠시 근무했던 K라는 남학생이 떠오른다. 해마다 연말 행사를 치르느라 두 달여 동안 아르바이트생을 뽑게 되는데 그 인연 중에 유독 존재감이 컸던 청년이었다.

어떠한 일을 맡기든 명석함이 빛났다. 꼼꼼하고 확실했고 때론 독특한 발상으로, 내가 덤을 얻는 횡재의 기분을 느끼게 할 만큼 신선한 능력을 발휘했다. 또래 나이답지 않게 자신의 몫을 벌처럼 날아다니며 찾는 부지런함도 남달랐다. 게다가 늘 입가에 떠나지 않은 건강한 미소까지, 나무랄 데가 없었다.

혹한의 겨울 추위에도 한 시간여 거리를 한결같이 걸어서 출퇴근한 의지도 대견해 보였다. 왕성한 혈기에 당연히 그럴 수 있다지만, 편함에 길들여진 요즘 세대로는 쉽지 않은 인내이다. 

어느 날은 사무실에 쌓인 이면지를 좀 가져가면 안 되느냐고 묻는다. 공부할 때 연습장으로 쓰면 좋겠다고 한다. 기특하여 한껏 넣어준 불룩해진 종이 가방을 메고 뚜벅뚜벅 걸어가는 뒷모습에선 무엇도 쉽게 포기하지 않을 뚝심이 전해졌다. 

그런데 하루는 대화 중 저녁에 가족들과 외식 약속이 있다는 내 말에 전과 달리 표정이 시무룩한 눈치였다. ‘무슨 일인가?’ 무언의 눈빛을 읽었는지 “저는요, 언젠가 결혼을 하고 아이들이 생기면 함께 여행을 자주 다닐 거예요. 그리고 가는 곳마다 특별하고 맛있는 음식을 먹여주는 추억이 많은 아빠가 되는 게 꿈이에요.”라고 한다. 아버지의 힘겨운 노동으로 넉넉지 않은 생활에, 지병을 달고 사는 어머니는 매사 소극적이라 집 밖을 모르고 사는 게 안타깝다고 한다. 가끔은, 길거리 국밥 한 그릇을 먹더라도 가족과 오붓한 나들이 한 번 어려운 현실이 버거웠던 모양이다.

늘 의젓하게만 보였던 K의 상실감에 찬 아픔이 남의 일 같지가 않았다. 누구에게는 평범할 수 있는 것들이 또 그 누군가에겐 꿈일 수도 있는 거구나. 그래도 삶의 균형을 잃지 않으려는 K의 패기만만함이 아름다웠다.

누구든 상대적으로 채워지지 않은 결핍에 대한 가슴앓이가 있는 법이다. 그래도 어느 부모인들 자식에게 풍족한 언덕이기를 마다할 건가. 결핍이 없는 삶이라면 종이 한 장의 소중함과 가족과의 단란한 시간에 대해 그리 연연하고 간절하진 않을 거다.

결핍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눈물의 시간이 더 많았을 K의 해맑은 얼굴이 더 먹먹하게 다가왔지만, 생각해보면 내가 겪어온 많은 사람 중에는 결핍을 경험한 사람들이 이해의 폭도 넓었고 더 절실하고 깊게 삶의 의미를 두고 있었다. 

아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다. 우리의 힘든 결핍은 더 큰 고통을 헤쳐나갈 힘의 원천일 테고, 너의 결핍을 위하여 엄마는 늘 응원하고 있음을 기억해 달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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