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호암동 유적 보존방안 결정
오늘 호암동 유적 보존방안 결정
  • 박상일 <역사학자·청주문화원부원장>
  • 승인 2015.02.2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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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단상

박상일 <역사학자·청주문화원부원장>

지난달에 충주에서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한 엄청난 유물들이 쏟아져 나왔다. 

충주 호암동의 종합스포츠타운 부지에 대한 발굴조사에서 구석기유물 층을 비롯해 초기철기시대와 통일신라∼조선시대 무덤, 숯가마 등이 확인되었는데 특히 초기철기시대의 돌무지나무널무덤(積石木棺墓)에서 세형동검(細形銅劍) 7점, 청동 잔줄 무늬거울(細文鏡) 1점, 청동 투겁창(銅 ) 3점, 청동 꺽창(銅戈) 1점, 청동 도끼(銅斧) 1점, 청동 새기개(銅 ) 4점, 청동 끌(銅鑿) 2점 등의 청동유물 19점과 검은 간토기(黑陶)가 출토된 것이다. 

호암동은 충주시내 남쪽의 낮은 구릉지로서 학계에서는 이미 문화유적의 보고로 예견된 곳이었다. 1980년대부터 각종 개발로 인한 발굴조사 때마다 어김없이 무덤과 주거유적들이 확인되었고, 최근에는 토성 터가 발굴되어 중원경성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번에 발굴한 유적유물은 충주지역의 초기 역사를 연구하는데 획기적인 자료이다. 세형동검 하나만으로도 충주와 같은 고도의 근원에는 청동기시대 이래의 지방정치세력이 존재했고, 독자적인 지역문화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주는데 충분하다. 절대왕권 아래 정치조직이 확립된 고대국가 이전에는 흔히 부족국가라 부르는 시기가 있었다. 학자에 따라서는 소국(小國) 또는 초기국가 군장국가 족장국가 추장국가라 표현하기도 하지만, 강력한 권력을 가진 통치자가 부족을 다스렸던 시대를 지칭함에는 이견이 없다. 세형동검은 그들 권력의 상징물이었다. 

청동기시대 동검은 전기의 비파형동검과 후기의 세형동검으로 대별된다. 비파형동검은 전통악기인 비파처럼 생겼다 하여 붙여진 이름으로 중국 요령지역에서 많이 발견된다고 해서 요령식동검 또는 만주식동검이라 불렀지만, 한반도 남부에서도 발견되기 때문에 이제는 지역을 한정하기는 어려워졌다. 

반면 세형동검은 한반도 내에서만 발견된다 하여 한국식동검이라 불렀는데 이 역시 비파형동검이 한반도 전역에서 나오므로 굳이 한국식이라 부를 필요가 없어졌다. 

충주는 한반도 중부와 남부를 이어주는 교통의 요지로서 어느 왕도(王都)에 못지않은 찬란한 중원문화의 꽃을 피웠던 지역이다. 중원문화의 상징으로 탑평리칠층석탑 일명 중앙탑을 내세우는데 누구도 주저하지 않는다. 

중앙탑이 고구려 국원성, 신라 국원소경 중원경을 거쳐 고려시대 이후 충주목이 되어 국토의 중심을 이뤘던 상징이라면 호암동 세형동검은 충주역사의 밑바탕을 보여주는 유물이다. 세형동검은 흔히 쌍두령(雙頭鈴) 팔주령(八珠鈴) 간두령(竿頭鈴) 등의 청동방울이 동반해 출토되는데, 호암동에서는 출토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이 무덤에 묻힌 사람은 종교적인 권위는 어느 정도 벗어버리고 정치적인 권력만으로 지역을 다스리던 수장(首長)이 아닐까 생각된다. 중국의 역사서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마한(馬韓)에 속한 54개국이 열거되어 있는데 그중에 하나는 충주에 있었을 것이고, 7자루의 세형동검을 품고 무덤에 묻힌 사람은 이 소국의 수장이었을 것이다. 

충북환경연대 등 시민단체는 2017년 전국체전을 위해 종합스포츠타운 건설이 불가피하다는 충주시의 입장에 따라 원형보존에서 원형이전복원으로 한발 물러서는 모습이다. 

전국의 각 박물관 야외에는 원위치를 떠나 이전된 유구들이 많다. 박제된 유구를 바라보는 관람자의 시선은 별 느낌이 없이 무덤덤하다. 유적은 역시 원위치에 있어야 생명력을 갖는다. 오늘(27일) 문화재위원회에서 호암동 유적의 보존방안이 결정된다고 하는데 결과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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