뫼비 우스의 띠
뫼비 우스의 띠
  • 반영호 <시인>
  • 승인 2015.02.26 1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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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 앞에서

반영호 <시인>

우수 지나고 확연히 달라지더니 겨울도 끝이 났다. 경칩을 일주일 남겨놓은 이때, 때론 장독이 깨진다는 옛말이 있긴 하지만 분명 모진 추위와 내리던 눈도 물러갔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따뜻한 바람이 매서운 동장군을 물리친 것인가? 그래서 유능제강(柔能制剛), 부드러움이 강함을 제압한다는 말이다. 마지막 끄트머리는 절벽과도 같다.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도 없거니와 되돌아갈 수도 없는 외길의 끝. 때때로 앙탈인 양, 시기하는 양 바람은 불어대지만 따사로운 훈풍으로 바뀐다. 산그늘 아래 바위 밑이나 골짜기에 남아있는 잔설은 마치 치열한 전투에서의 낙오자인 듯 패잔병같이 쓸쓸하다. 겨울과 봄 사이, 겨울의 한 면과 봄의 한 면을 접으면 동춘의 모서리가 생긴다. 여전히 시퍼렇게 살아있는 동장군의 기세와 아직 미약하나마 개선장군의 기백이 당당한 온기의 충돌. 생과 사의 사이. 끝은 곧 또 다른 시작이다. 땅속에 묻힌 한 톨의 밀알이 죽음으로서 새로운 싹이 돋아나듯 종말은 희망의 시작이다.

세월은 지진이부지퇴(知進而不知退) 나가는 것만 알고 뒤로 물러서는 것은 모른다. 그런 세월의 시간은 만물의 재료이다. 시간이야말로 모든 것을 창출해 낼 수 있는 귀하고 소중한 것이다. 이 시간은 누구나 자유롭게 주어지고 또 사용할 수 있다. 어디서 어떻게 무엇을 하든 상관하지 않는다. 최대한 유용하게 활용하면 된다. 앞으로만 나가는 세월의 시간은 장소도 바뀌게 한다. 같은 장소라 할지라도 시간이 흐를 수록 변하는 것이다. 조금씩 조금씩 눈에 보이지 않게 바뀌다가 확연히 다른 모습이 된다. 시공(時空)에는 분명 유통기간이 있다. 그때 그 장소에서 해결하지 않았다면 영원히 이루지 못한다. 우리가 느끼지는 못하는 동안 쉼 없이 흐르는 시간은 막을 수도 되돌릴 수도 없다. 시간은 낮과 밤을 바꿔 놓고 계절을 바뀌게 하고 해를 바꾸고 세월을 바꿔 놓는다. 지나고 난 시간을 돌아보면 아쉬움 천지다. 물론 기쁘고 즐겁고 행복한 일이 있지만, 보람보다는 아쉬움이 더 많다. 잘못된 일이 있어도 아쉬움이 있어도 수정할 수 없다. 뒤늦게 발견된 오점은 영원히 고칠 수 없는 오점으로 남아 후회해도 소용없다.

과거로 회항할 수 있는 시간의 타임머신이란 우리가 상상하는 희망사항일 뿐 불가한 일이다. 이런 관점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 뫼비우스의 띠다. 어차피 되돌아갈 수 없다면 방법은 앞으로 나가 그 자리로 찾아가보는 것이다. 뫼비우스의 띠는 위상수학적인 곡면으로, 경계가 하나밖에 없는 2차원 도형이다. 안과 밖의 구별이 없는 대표적인 도형으로서 비가향적이다. 뫼비우스 띠의 오일러 지표는 0이다.

어느 지점에서 띠의 중심을 따라 이동하면 출발한 곳과 반대 면에 도달할 수 있다. 이 상황에서 계속 나아가면 두 바퀴를 돌아 처음 위치로 돌아오게 된다. 이러한 연속성에 의해 뫼비우스 띠는 단일 경계를 가지게 된다. 띠의 중심을 따라 뫼비우스 띠를 자르면 두 개의 띠로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단일한 두 번 꼬인 띠가 된다. 이것은 뫼비우스의 띠가 단일한 경계를 가지기 때문인데, 자르기를 하면 두 번째 경계가 생겨나는 것이다. 띠의 중심을 따라 1/3씩 평행한 두 줄로 자르면 두 개의 띠로 분리된다. 하나는 동일한 길이의 뫼비우스의 띠가 되고, 다른 하나는 두 배로 긴, 두 번 꼬인 띠가 된다.

종종 지나간 역사를 생각해 본다. 그리고 현재와 과거를 재본다. 요즘 정치형국을 보면 꼭 닮은꼴이다. 남인 서인, 노론 소론. 무슨 당 무슨 당들의 당파 싸움. 어쩌면 역사가 과거의 복사판인 듯싶다. 

봄이다. 골짜기마다 동면에서 깨어난 개구리들의 울음소리가 우렁차다. 이 봄. 지금 뫼비우스의 띠를 타고 겨울을 지나 봄으로 가는 멋진 시간여행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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