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북의 산티아고, 괴산
충북의 산티아고, 괴산
  • 성은혜
  • 승인 2015.02.25 19: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별기고

성은혜 <SK하이닉스 NAND PKT2팀>

대한민국 남녀노소·연령 불문하고 입버릇처럼 나오는 단어가 있다. 바로 ‘힐링’이다. 빛보다 빠른 인터넷의 발전으로 그 어느 때보다 풍요의 시대를 만끽하고 있다지만 어쩐지 할 일은 점점 많아지는 건 기분 탓일까? 

누구나 훌쩍 떠나고 싶은 마음은 천근 같은데 행동으로 옮기는 데는 만근 같은 경험을 한번씩은 해봤을 터, 오히려 편리함이 주는 세상과 달콤한 휴식을 맞바꿈 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그러다 보니 너도나도 자연스럽게 숨통이 트일만한 곳을 찾기 위해 나만의 버킷리스트를 만드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단골손님처럼 어김없이 회자되는 곳이 바로 스페인의 산티아고 순례길이다. 

정식 명칭은 카미노 데 산티아고(Camino de Santiago)로 성 야고보의 유해가 묻혔다고 전해진 이 곳은 스페인의 북쪽 갈리시아 지방에 위치한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Santiago de Compostella)의 성을 향한 순례길이다. 

보통 800Km에 달하는 거리를 30~40일 정도의 기간을 잡고 완주한다고 하니, 보통 사람들에게 쉬운 선택은 아닐 뿐만 아니라 종종 현실의 신분을 내려놓고 진정한 자신을 되돌아보는 계기로 떠나는 사람들도 적지 않게 볼 수 있다.

나 또한 그 머나먼 땅이 그리워 현실과 줄다리기를 옥신각신 하다 보니 발 닿을 날이 영영 오지는 않을까 때론 조급해지는 순간도 있었다.

이런 내 마음을 누군가 알아차리기라도 한 걸까? 우연히 웹사이트에서 ‘연풍성지’라는 곳을 발견하게 되었는데 총천연색의 신비한 오로라 같은 선한 광채가 성지 주위를 비춰주는 것만 같았다. 

아주 오랜 세월 천주교 박해로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버린 무고한 백성들의 순수한 신념이 가슴 아픈 사연을 더해 아름다운 자연의 색채감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데다 군데군데 남아 있는 애달픈 흔적을 발견하면서 적지 않은 충격을 더해주었다. 

더는 고민할 필요없이 머나먼 스페인 대신 가까운 충북 산티아고 순례길을 다녀오기로 했다.

괴산 연풍면을 찾으면서 아담한 시골 풍경만을 상상했던 나는 천주교의 색채가 가득한 연풍성지를 비롯해 조선시대 지배사상의 근원인 유교를 가르치는 교육기관이었던 연풍향교와 깎아내릴듯한 절벽 전면부에 양각된 우리나라 보물 ‘마애이불병좌상’의 불교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천, 유, 불의 서로 다른 종교가 자연스럽게 공존하는 것을 보고 예상치 못한 의외의 광경에 감탄을 금치 못했다. 

본연의 아름다움에 가려진 슬픈 이면을 알고 나면 그 곳의 현장은 핏빛으로 물든 무고한 천주교인들의 박해가 일어난 끔찍하고 아픈 기억이 절로 회상될지도 모른다. 

주홍글씨 같은 신분 차별로 억울한 대우를 받아야 했던 백성들이 하늘아래 모두가 평등하다는 천주교를 통해 비로소 자신이 소중한 존재임을 일깨워줄 때 느꼈던 심경은 어땠을까? 순수한 신념이 흔들리지 않았던 것은 그 만큼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생존으로 생각해볼 수 있지 않을까? 그 시대를 문득 돌아보니 지금의 풍요 속 빈곤이라 치부하며 불만을 터트린 내 자신이 한쪽으로 비뚤게 바라보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아득하리만치 적막한 성지 주변에는 맑은 새소리와 나뭇가지들이 애달픈 바람에 서로의 몸을 비벼대며 내는 소리가 유달리 귓가를 맴돌았다. 일상의 소리들마저 묻혀버리게 할 만큼 바쁘게 살아온 것은 아닌지, 자연이 들려주는 소리들이 더욱 가깝게 느껴져 왔다.

이제 막 연풍성지를 나왔을 뿐인데 벌써 많은 깨달음이 오고 가는 것 같았다. 이 순간들이야말로 내가 원하던 힐링이 아니었을까? 파도처럼 출렁이던 마음들이 잔잔한 심해를 들여다보는 듯 고요했기 때문이다. 

잘 정리된 표지판을 따라 작지만 아담한 동네를 한 바퀴 돌 듯 따라가기만 해도 마음 편한 이 곳, 굳이 멀리 가지 않더라도 내 마음에서 저절로 느껴지는 감동이 있을 때 그 곳이 바로 영혼을 달래 줄 ‘산티아고’라고 나는 생각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