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간 옛것
지나간 옛것
  • 윤승범 <시인>
  • 승인 2015.02.24 1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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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윤승범 <시인>

설이 지났습니다. 곧 정월 대보름달이 가득 찰 것입니다. 그러나 명절도 옛 같지 않고 세월도 예전 같지는 않습니다. 가끔 옛것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만 결코 돌아갈 수 없는 강을 건넜을 테지요.

시골에 들어와 산지 얼추 이십 오년 정도 되었습니다. 지금도 시골이지만 그때는 더 시골이어서 별스러운 풍경들이 많았습니다. 서울에서 나고 자라 처음 보는 시골 풍경은 신기한 것들이 많았습니다. 

시골의 생일은 새벽 댓바람부터 시작합니다. 노망기 성한 촌노들도 며칠 전에 흘려들었던 ‘아침 국 자시러 오셔유’라는 소리를 잊지 않고 있다가 일찍부터 잔칫집에 모입니다. 잔칫상 위에 놓인 댓병들이 소주를 반주 삼아, 해장 삼아 취해서 하루를 시작하고 취해서 하루를 마감합니다. 출근하는 나를 붙잡고 ‘윤 선상님도 소주 한 잔 하소!’하며 밥 담았던 공기에 막소주를 가득 부어주곤 했습니다. 

동네잔치때면 새벽부터 돼지를 잡았습니다. 출근길 동네 회관을 지나치노라면 방금 명줄을 끊어놓은 돼지 배를 갈라 내장을 끄집어내고 염통이며 간을 가마솥 맹물에 삶았습니다. 김 펄펄 나는 것을 저며 막 소금에 찍어 먹으며 출근하는 내게 디밀면서 ‘윤선상님, 이 것 한 점 허고 가!’라며 돼지 냄새 역한 그것을 내 코밑에 들이밀고는 했던 풍경을 이제는 어디에서고 볼 수 없는 시절이 됐습니다.

좋은 일만 잔치가 아니라 궂은일도 잔치였습니다. 초상이 나면 영안실로 가는 것이 아니라 안방에 청을 차려 놓고 마당에는 마을 아낙들이 가득 모여 산역(山役)을 마칠 때까지 문상객들 수발을 도왔습니다. 마당 한켠에는 연탄을 가득 쌓아 불을 피우고 차일 친 마당 곳곳에서는 떼를 지어 화투 놀이를 하기도 하고 가끔은 윷놀이가 벌어지기도 했던 초상집 풍경이 있었습니다. 그런 것들은 이제 모두 멀리 가고 없습니다. 다시는 돌아올 수도, 돌아갈 수도 없는 과거의 흔적으로만 남았습니다. 

이제는 어느 시골을 가도 방 한가운데를 차지하고 있는 티브이가 앵앵대고 있고 똑같은 상표를 가진 전국구의 통닭과 피자 그리고 초상이 나면 의례히 영안실로 가야하고 주문 음식점에서 만들어내는 똑같은 육개장과 수육, 부의(賻儀)가 찍힌 돈 봉투 한장 건네고 뒤돌아서는, 그래서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는 돈으로 멀고 가까움을 표시하는 사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옛것은 귀찮고 번거롭습니다. 차가운 물에 손을 담궈야 하고 아무리 덥거나 추워도 몸을 움직여야 하는 수고로움이 뒤따릅니다. 그러나 거기에서 우리는 조금씩 사람 사이의 정을 느꼈고 멀고 가까움을 떠나 마음과 마음이 닿는 감정을 나눴습니다. 지금 것은 편하고 간편합니다. 문상을 갈 시간이 없으면 돈 봉투를 부탁하면 되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으면 계좌 이체로 휘리릭 하면 내 마음이 전달되는 그런 시절이 왔습니다. 

살아간다는 것은 사람과 사람의 어울림에서 기쁨이 누려지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각자의 밀폐된 공간에서 제각각의 삶만 지키고 있습니다. 불편하고 힘들더라도 사람과 사람이 어울리는 그런 유토피아가 그리워지는 시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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