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로 쓴 편지
시로 쓴 편지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2.23 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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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누구나 살다보면 난관(難關)에 부딪히는 일이 생기게 마련이다. 예상치 못한 어려움에 심신이 지칠 대로 지쳐 있을 때 친구로부터 온 편지 한통은 보통 큰 위안이 아닐 것이다. 아는 사람 하나 없는 낯선 곳에서 가까운 친구를 만난 격이니 그 기쁨이야 말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편지의 한 글자 한 글자로부터 친구의 따뜻한 마음이 전해지는 것을 느끼다 보면 객지의 신고(辛苦)는 눈 녹듯이 사라져 버리곤 하는 것이다.
 송(宋)의 시인 구양수(歐陽修)는 서른이라는 이른 나이에 뜻하지 않게 좌천(左遷)되어 간 낯선 곳에서 친구의 편지를 받았다.
 
◈ 원진에게 장난삼아 답하여(戲答元珍)

春風疑不到天涯(춘풍의불도천애) : 봄바람 하늘 끝까지 이르지 않았는지

二月山城未見花(이월산성미견화) : 2월 산성에 아직 꽃핀 것을 보지 못했네

殘雪壓枝猶有橘(잔설압지유유귤) : 잔설이 나뭇가지 누르고 있는데도 귤이 있고

凍雷驚筍欲抽芽(동뢰경순욕추아) : 차가운 우뢰소리에 죽순이 놀라 싹트려네

夜聞歸雁生鄉思(야문귀안생향사) : 밤에 돌아가는 기러기 소리 들으니 고향 생각 간절하고

病入新年感物華(병입신년감물화) : 병든 몸으로 새해를 맞으니 고운 경물에 울컥해 지네

曾是洛陽花下客(증시락양화하객) : 일찍이 낙양성에서는 꽃 속의 나그네

野芳雖晚不須嗟(야방수만불수차) : 들꽃이 늦어도 한탄할 필요 없다네


※ 시인이 좌천되어 간 곳은 오지 중의 오지라고 할 수 있는 협주(峽州)의 이릉(夷陵)이라는 곳이었는데 그때 마침 시인의 절친한 친구였던 정보신(丁寶臣)이 협주(峽州)의 판관(判官)으로 있었다. 그의 자(字)가 원진(元珍)이었는데 그는 실의에 빠진 친구를 위로하기 위해 화시구우(花時久雨)라는 시를 지어 보냈다. 이에 기운을 차린 시인이 그 답으로 시를 쓴 것이다.

시인이 당도한 곳은 어찌나 외지고 험한 곳이었던지, 봄바람조차도 이르지 못하고 음력 2월인데도 꽃이 아직 보이지 않을 지경이다. 하늘 가장자리(天涯)니 산성(山城)이니 하는 표현들은 그곳이 오지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들이다. 그러나 늦게 올 뿐, 봄이 아예 오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잔설(殘雪)이 가지를 누르고 있었지만 귤(橘)은 여전히 매달려 있었고 겨울 천둥이 울렸지만 도리어 그 소리에 놀라 대나무가 싹을 틔웠으니 말이다.

그러나 봄이 곧 오리라는 희망도 잠시, 밤이 되면 들리는 기러기 소리에 향수병이 도지는 것은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그리고 객지에서 병(病) 중에 맞은 새해인지라, 주변의 고운 경물(景物)에도 마음은 착잡하기만 하였다. 감상에 빠진 시인을 위로한 것은 화려한 낙양(洛陽) 시절에 대한 회상이었다. 한때는 화려한 낙양(洛陽) 거리의 꽃 아래를 누비던 나그네였던 적도 있었으니 지금 기거하고 있는 허허벌판에 꽃이 늦게 핀다고 해서 탄식할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고 있는 것이다.
 본의 아니게 갑자기 낯설고 외진 곳으로 좌천되어 간다면 그 낙심은 이만저만이 아닐 것이다.

이 때 또 생각지도 않은 친구가 마침 그곳에 있어서, 위로의 편지를 보내왔다면 이것처럼 반가운 일도 없을 것이다. 그것도 시로 쓴 것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시로 보내온 친구의 편지에 시로 응수(應酬)하다 보면 웬만한 객고(客苦)는 잊혀지고도 남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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