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비밀은 요’(1)
‘청주의 비밀은 요’(1)
  • 김영미 <청주시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5.02.22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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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청주시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청주의 비밀은 요’ 하고 해설을 시작하면 사람들은 무슨 큰 비밀이라도 있나싶어 눈빛을 반짝이며 내 이야기에 귀를 바짝 기울인다. 청주 시내 읍성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의외로 많지 않다. 100여 년 전 청주의 성안길은 조선의 행정중심지인 청주 읍성의 큰 길이었다. 성안길이라 이름 붙은 곳은 유행의 첨단이며 패션거리로 청주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비밀은 청주시내 한 가운데 커다란 성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이 사는 읍내에 성이 있었기 때문에 읍성이라 불렀다. 그러나 아쉽게도 지금은 청주 읍성의 성곽은 남아 있지 않다. 일제 강점기에 일본은 시가지 개정 사업을 추진하면서 성곽을 헐어 하수구를 쌓는 만행을 저질렀다. 성안의 행정시설들도 많이 훼손되었다. 읍성 안에는 관아도 있었지만 민간인들의 집도 있었다. 임진왜란 당시 의병의 활약으로 육지에서 일본군과의 첫 승리를 가져다 준 곳도 바로 청주 읍성이다.

청주 읍성은 한강 이남에서는 손꼽히는 읍성이었기 때문에 옛날부터 임금이 남쪽으로 행차할 때면 으레 묵어가는 곳이었다. 고려 공민왕은 청주에서 6개월이나 머물렀고 과거 시험을 열기도 했다. 읍성을 처음 쌓은 것은 신라 신문왕 9년(689년)이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하고 지방의 통치를 위해 5소경을 설치할 때 청주에는 서원소경을 두었고 뒤이어 성을 쌓은 것이다. 청주 읍성의 정확한 모습이 알려진 것은 전남 구례 운조루에서 조선 정조 때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청주 읍성도>가 발견되면서부터다. 청주읍성은 둘레가 1783m이고 높이는 4m에 달했다.

읍성의 구조를 보면 남북으로 긴 장방형인데 남문에서 북문으로 큰 길이 직선으로 뚫려 있다. 그러니까 남문과 북문을 잇는 성안길은 청주읍성을 처음 쌓았을 때부터 있었던 아주 오래된 길이다. 동문과 서문 사이는 어긋나는 통로로 연결돼 있었다고 한다. 

청주 읍성의 정문은 남문으로 지금의 국민은행 청주지점 앞 사거리의 청남문(淸南門)이다. 이곳은 청남문을 보호하기 위해 적의 침입을 차단하는 보호시설인 옹성이 문 앞에 있었기 때문에 유난히 광장이 넓다. 문은 무지개 모양의 홍예문이었으며 문 위에는 누각이 있었다고 한다. 

서문이 있었던 곳은 남문에서 서쪽으로 돌아 청주 YMCA건물을 지나 중앙공원 담을 따라 가는 길이 성벽이 있던 자리이고 족발골목이 시작되는 오거리에 서문인 청추문(淸秋門)이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때 청주성을 되찾기 위해 조헌과 영규대사, 그리고 관군이 왜군과 치열하게 전투를 벌였던 곳이다. 당시 의병의 활약으로 육지에서 일본군과의 첫 승리를 가져다 준 곳이다.

서문에서 CGV상가 건물을 지나 큰 길과 만나는 지점은 둥글게 굽어지는데 이곳은 성벽이 둥글게 돌아간 흔적이다. 도로를 따라 조금 더 가서 성안길이 시작되는 지점에 북문인 현무문(玄武門)이 있었다. 북문의 좌우를 자세히 보면 도로가 어긋나 있다. 이것은 성문을 보호하기 위해 성벽을 어긋나게 쌓았던 흔적이다.

북문터를 지나 큰 길을 따라 남쪽으로 걸으면 도청 사거리를 거쳐 롯데 영플라자 앞의 동문인 벽인문(闢寅門)자리에 닿는다. 동문 밖에는 논이 있었고 청주 향교와 성황당이 있는 당산으로 가는 길이 이어져 있었다. 벽인문은 ‘호랑이를 막는 문’ 이란 뜻으로 특이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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