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흙 속에서 연꽃이 핀다?
진흙 속에서 연꽃이 핀다?
  • 윤승범 <시인>
  • 승인 2015.02.10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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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임즈 포럼

윤승범 <시인>

세월을 먹다보면 어렸을 때 문구로 배웠던 구절이 체감으로 느껴질 때가 많습니다. 그 중 한 문장이 ‘연꽃은 진흙 속에서 핀다’였습니다. 글로만 배울 때는 연꽃은 진흙 속에서 피는 꽃. 아무리 더러운 곳에서라도 고고한 제 품성을 지키는 것의 표본이라는 정도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여러사람이 부대끼고 어울리다 보면 고고한 인격들만 있는 경우가 쉽지 않습니다. 사람을 직종이나 업에 따라 구분하자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가 어떤 일을 하는가를 떠나서 타고 나서 기른 저마다의 선한 품성을 갖췄느냐의 문제입니다. 타고 났든 후천으로 갈고 닦았든 간에 우리는 나이를 먹으면서 세월의 향내를 묻히게 됩니다. 그래서 깨끗한 향이 풍기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렇지 않은 경우도 많습니다.

아주 오래전 글을 배울 때 스승을 모신 적이 있었습니다. 천부(賤夫)로 살다가 그런 분들을 뵈니 ‘저런 인품(人品)이 있구나!’ 싶었습니다. 몇해를 모신 뒤 내 복이 거기에 그쳐 연이 끊기고 말았습니다. 스승과 떠나 오랜 세월이 흘렀습니다. 스승에게서 배웠던 향기는 어느새 낡은 기억으로만 남고 이제 속인 중에서도 천격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동안 나를 스쳐간 많은 것들 중에 천격도 있었고 더 나은 귀격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속인의 삶이다 보니 살기에 바빠 제 한몸 추스르기에도 힘든 벗들이 더 많았습니다. 그렇게 어울리다 보니 어느덧 내 몸에서는 찌든 담배 냄새가 가득하고 시를 읊던 입에서 시도때도 없이 육두문자가 쏟아져 나오기도 하고 잠자리에 들기 전에는 싸구려 막소주에 취해 삭은 김치처럼 널부러지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어느날 삼국유사에 나오는 조신(調信)이처럼 부지깽이로 화톳불을 만지다가 번뜩 생각이 들었습니다. 진흙 속에서 연꽃을 피운 연의 고통이 얼마나 극심했을지를 깨달았습니다. 온갖 더러운 것들을 걸러내고 걸러내서 예쁜 꽃으로 승화시킨다는 것. 그 과정을 거치기 위해 연은 얼마만한 인내를 가져야 했고 유혹을 넘겨야 했으며 올바른 사리분별을 갖추고 있었을까를 생각했습니다. 

우리네 삶도 그와 같을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온갖 잡다한 것들로 가득차 있습니다. 물론 내가 뿜어내는 악취도 섞여있습니다. 그 것 중에서 어느 것을 고르고 어느 것을 버려야 하는지를 구별하는 지혜, 그것을 골라낸 후에 내 것으로 지녀야 할 것과 버려야 할 것을 실천하는 행동, 거르고 걸러서 올곧은 것만을 제 것으로 가르는 현명, 더러움과 아름다움을 차별하지 않는 지혜. 이 모든 것들을 거친 뒤에야 피어내는 것이 ‘진흙 속의 연꽃’의 의미임을 이제야 알게 됐습니다. 

이제 살아온 날들보다 살아갈 날이 훨씬 적은 나이가 됐습니다. 여태 허송한 세월을 이겨내고 순결한 연꽃 하나 피울 수 있을까를 생각합니다. 자신이 없습니다. 이 나이가 되도록 아직도 갖추지 못한 천부의 생활이 비굴할 뿐입니다. 진흙 속에서 피운 연꽃, 그 장한 근기(根基)가 내 마음 어딘가에 있을까요? 있기나 할까요? 참람한 진흙 구덩이와 같이 나 또한 더러운 오니(汚泥)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닫는 겨울 찬바람 한가운데에 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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