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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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임현택 <수필가>
  • 승인 2015.02.10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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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임현택 <수필가>

엄마의 손길이 절실하게 필요한 유아 때부터 친정어머니가 아이 둘을 친정집에서 키우기 시작했다. 맞벌이 워킹맘으로 주말이면 집에 데리고와 함께 보낸 후 다시 친정집에 아이들을 맡겨야만 했다. 그럼에도 아이들은 엄마에게 매달리고 찾는 통에 돌보는 어머니는 어머니대로 육아에 힘겨운 날을 보내야 했다.

아이나 부모님, 그리고 그들 부부에게도 어렵게 육아와 직장생활이 이어지고 있었으니, 사실 여성들이 사회생활을 하면서 애로사항 1순위가 육아이다. 육아휴직을 하면서 미래에 대한 불안감과 스트레스로 인해 휴직을 못하면서 젖도 떼지도 못한 아이를 친정이나 시댁에 떠맡기다시피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렇다. 베이비붐 세대(1955~1963년생)의 퇴직이 시작 된 지 이미 몇 년을 훌쩍 넘어서고 있다. 그들은 은퇴 후 수십 년을 준비하지 못한 세대이다. 수명이 점점 늘어가는 현시대, 은퇴준비는 돈, 그러나 경제력이 있다고 준비가 끝나는 것은 아니다. 아침이면 뭔가를 할 수 있는 일, 가야 할 곳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굳이 밖이 아니더라도 재택근무면 어떠랴.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게 중요한 것인데 할 일이 없는 게 현실이다. 때문에 자연스레 하빠(?)가 가랑비에 옷 젖듯 조금씩 스며들어 이젠 자연스럽게 정착이 돼 인생의 2막을 열고 있다.

하빠가 인기상승이다. 하빠는 할아버지, 아빠를 합친 신조어이다. 맞벌이로 바쁜 엄마 그리고 아빠가 아이를 키울 수 없을 때 할아버지가 사랑까지 듬뿍 주며 손주를 키우는 것이 하빠의 일이다. 은퇴 후 손주 키우기 전선에 뛰어드는 베이비부머세대, 정작 그들은 노년의 계획보다는 가족의 생계와 경제에 매달려 앞만 보고 달려왔으니 당연히 은퇴 후엔 할 일이 없다. 어쩜 자연스레 하빠가 되는 건 아닐까 하는 염려도 되지만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건 하빠가 그냥 주어지는 건 아니다. 잠재우고 먹여주고 놀아주는 일이 전부가 아닌 것, 세대에 발맞추어 아이를 양육해야 하는데 발 빠르게 눈과 귀 그리고 정보에 능통해야만 한다. 하빠는 할머니와 역할을 분담해 더 잘할 수 있고, 어디까지나 조력자로서 일을 잊으면 안 될 뿐만 아니라 청년이 아니라는 사실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가장 중요한 건 우리 손주가 최고가 아니라는 객관적인 태도와 편견 그리고 내 손주가 우선이라는 사고를 버리고 전문가의 말의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렇게 육아에 전념하면서 하빠들은 또 다른 인생의 길목에서 삶의 행복을 찾는 것이다. 조선, 유교 나라 가부장제로 남녀유별 사상 시대 아니던가. 그런데도 그 당시에도 하빠가 있었다고 한다. 이른바 선비하빠라고나 할까(?). 요즘처럼 살림하는 남자가 많아지면서 ‘양아록’으로 유명한 이문건의 격대교육이 화제인 적도 있었다. 격대교육이란 조부모가 손자녀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부모 대신 교육시키는 것을 말한다.

조선의 선비 이문건이 쓴 ‘양아록’은 거의 유일한 양육일기라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요즘의 하빠처럼 이문건의 책 속에 담겨 있는 할아버지의 손자에 대한 애정과 엄한 교육 방법, 아이 젖 주기, 당시 누구도 피할 수 없었던 천연두, 단오의 그네놀이 등 조선시대 생활사의 모습들을 생생하게 증언해 주고 있는 자료이다. 뿐만 아니라 ‘양아록’은 단순한 양육 일기가 아니라 조선시대 역사 자료로서의 가치까지 현 세대에 전해지고 있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어르신들이 손주들을 돌봐주는 모습을 보면 왠지 애처롭고 가엾어 측은해 보이기도 했었다. 그러나 이제는 베이붐 세대들도, 신세대들도 당당한 이유는 그들만의 일이 있다는 점이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노년 기야말로 아름다운 황혼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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