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육 도시 청주의 정체성과 신항서원
교육 도시 청주의 정체성과 신항서원
  • 김명철 <충북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사>
  • 승인 2015.02.09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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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명철 <충북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사>

청주 김수녕양궁장 입구에서 상당산성을 바라보고 좁은 시골길로 들어가면 용정동 이정골 마을이 나온다. 이곳에 조선시대 삼남 최고의 서원으로 불리는 신항서원이 있다. 

서원은 조선시대 향교(공립학교)와 더불어 학자들에 대한 제사를 지내고 양반의 자제들을 교육시키던 사립학교에 해당하는 교육 시설이다. 신항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 서원이 세워진지 불과 30년 뒤인 1570년에 세워졌다. 처음에 유정서원으로 불리다가 ‘신항서원’으로 바뀐 이유는 현종 원년(1660)에 임금으로부터 사액을 받아 이름을 ‘신항서원’으로 바꿨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서원들이 설립 당시에는 교육적 기능을 우선시 했으나 임진왜란 등 외침과 당파싸움에 연관되면서 사액이 남발되고 정치적인 이전투구의 장으로 변질됐다. 

청주 신항서원도 1660년 신항서원으로 사액되고 그 후 계속 중건되어 오다가 고종 8년(1871년) 대원군에 의해 단행된 서원훼철령으로 폐지된 후 광무 9년(1904)에 복구되었다. 그 후 1957년 청주 유림들에 의해 신항서원이 재건됐고, 1987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는 것이다. 

신항서원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비각이 하나 있다. 이 비각 속의 비가 바로 숙종 11년(1685)에 세운 신항서원묘정비이다. 유정서원에서 신항서원으로 바뀐 내용을 알 수 있는 비석이다.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짓고 서원현감이었던 조형기가 썼다. 비문의 내용은 서원에 모신 아홉분을 소개하고 있고, 그 중에 신항서원의 이름과 관련된 구절이 있다.

“주희선생께서 일찍이 남강에 백록동서원을 세우고, 매우 광범위하고 세밀한 규약을 게시했다. 그러나 결국 그 내용을 한마디로 포괄하면 신야의 이윤과 누항의 안연일 뿐이다… 현종께서 신항(莘巷) 두 글자로써 서원의 이름을 삼아 편액을 내려 주셨다”라는 내용이다. 중국의 선현인 이윤과 안자의 출생지인 ‘신야’와 ‘항루’에서 한 글자씩을 따서 ‘신항서원’의 이름이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서원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대부분 교육적 기능보다는 유학의 선현을 받들어 모시는 곳으로 알고 있다. 이는 조선후기에 이르러 교육의 기능보다 선현에 제사지내는 것을 더 강조했기 때문이다. 신항서원에도 아홉 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구현사라는 사당이 있다. 사당 안에는 일렬로 아홉 분의 위패가 있는데 처음에는 ‘경연’, ‘박훈’, ‘김정’, ‘송인수’ 4분을 모시다가 인조 20년(1642)에 ‘한충’을 추가로 배향하고, 효종 1년(1650)에 ‘송상현’, ‘이득윤’을, 그리고 효종 7년(1656)에 ‘이이’, ‘이색’을 추향해 아홉 분을 모시게 된 것이다. 

그런데 아홉명 중에 눈길을 끄는 사람이 ‘경연’이다. 청주 남일면 효촌리의 유래를 만든 바로 그 효자 ‘경연’이다. 유교적 업적이 뛰어난 학자와 동일하게 학문적 업적도 변변치 못한 효자를 서원에 배향하는 것은 다른 지역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부분이다. 효성이 지극한 인물을 교육적 차원에서 귀감이 될 인물로 배향하고 있는 것이다. 인성이 바탕이 된 참 인재를 양성하는 우리고장의 전통을 보여준다. 

전성기때의 신항서원은 ‘동국문헌’에 충청도, 전라도, 경상도의 삼남에서 제일가는 서원으로 기록이 될 정도였다. 청주가 교육의 도시로 불리는 이유 중의 하나가 바로 조선시대 삼남 최고의 서원인 신항서원이 우리 고장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2015년 법고창신(法古創新)의 정신으로 ‘교육의 도시 청주’의 명성과 정체성을 다시 세우는 지혜를 모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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