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춘 날 한 잔
입춘 날 한 잔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2.09 18: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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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이십사절기(二十四節氣)의 맨 앞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다름 아닌 입춘(立春)이다. 보통 양력 2월 4일을 전후한 때인데, 사람들은 이날을 봄의 시작으로 간주하곤 한다. 아직 엄연한 겨울이지만, 사람들의 마음엔 이미 봄이 들어와 있는 것이다. 이제 겨울의 어둡고 무거운 느낌 대신 봄의 밝고 경쾌한 분위기가 지배하는 세상으로 바뀌었다. 조선(朝鮮)의 시인 이숭인(李崇仁)에게도 입춘(立春)은 반가운 날이었다.
 
◈ 입춘 날 한 잔 하다(立春小酌)

飄飄千里客(표표천리객) : 천리타향 나그네로 표표히 떠돌고
草草一年春(초초일년춘) : 한 해 봄은 성큼 다가오네
白愛村醪濁(백애촌료탁) : 흰 것으로는 시골 탁주를 좋아하고
靑看野菜新(청간야채신) : 푸른색 하면 새로 돋은 들녘 채소가 보인다.
感時仍自嘆(감시잉자탄) : 계절을 느끼고는 도리어 저절로 탄식이 일고
更事漸如神(경사점여신) : 모든 게 바뀌더니 점차로 귀신 같아지네
田父襟懷好(전부금회호) : 농부의 마음씨가 좋아
相從擬卜隣(상종의복린) : 서로 어울리며 이웃처럼 대해주는구나.

※ 시인은 그렇지 않아도 추운 겨울날에 천리타향을 나그네로 떠도는 처량한 신세이다. 그러니 봄의 도래를 알리는 입춘(立春)은 시인에게 여간 반갑지 않았을 것이다.

봄의 도래를 시각적으로 보여 주는 것으로는 파릇파릇 돋아나는 풀만한 것이 없다. 자신의 떠도는 처지를 표표(飄飄)란 말로 응집하고 새봄의 싱그러운 모습을 초초(草草)란 두 글자로 함축한 시인의 감각이 탁월하다. 입춘(立春)을 계기로 겨우내 침잠해 있던 시인의 감각기관이 되살아나기라도 한 것일까? 좋았던 빛깔이며 맛이 다시 떠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흰빛을 가진 것으로는 아무래도 시골 주막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탁주(濁酒)만한 것이 없다. 시골의 탁주(濁酒) 한 잔이 가져다주는 포근함이 우연히 흰빛을 띠었을 뿐이었겠지만, 이로 인해 시인의 뇌리에는 탁주의 흰 빛깔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흰 빛으로 각인된 것이리라. 또 파란색 하면 떠오르는 것도 있었으니, 새로 돋아난 들판의 푸성귀가 그것이다.

시인은 빛깔을 구체적 사물과 연계시켜 종합적 감각을 구성해내고 있는 것이다. 흰빛의 탁주 맛, 봄 들판 푸성귀의 파란 빛깔, 이런 것들을 통해 시인은 궁극으로는 봄을 느끼기에 이른다. 봄이 느낌으로 다가오자 시인은 도리어 지난겨울에 대한 탄식을 쏟아낸다.

봄에 의해 마음이 열린 시인에게 세상은 이전과 완전히 다른 모습이 되었다. 점차로 귀신의 일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봄이 왔다고 느끼면 농부들의 마음도 푸근해져서, 낯선 나그네인 시인과도 스스럼없이 어울리는 것이 마치 예전부터 가까운 이웃이었던 듯하다.

좀처럼 수그러들 것 같지 않던 동장군(冬將軍)의 위세도 때가 되면 꺾이고 마는 게 세상 이치이다. 어느 날 문득 달력에서 입춘(立春)이란 두 글자를 보는 순간, 사람들은 날은 아무리 춥더라도 마음으론 이미 봄이 왔다고 느끼게 되고, 이때부터 겨우내 어둡게 움츠러들었던 마음은 밝은 희망으로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이런 입춘(立春) 날 술 한잔을 곁들인다면, 봄은 한층 더 짙은 향을 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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