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음과 눈물에 대하여
울음과 눈물에 대하여
  • 김기원 <시인·문화비평가>
  • 승인 2015.02.04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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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편지
김기원 <시인·문화비평가>

울음과 눈물의 시인은 단연 김영랑과 김현승과 박용래다.

김영랑은 ‘모란이 피기까지는’에서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 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 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라고 노래했고, 김현승은 ‘눈물’에서 ‘더욱 값진 것으로/ 드리라 하올 제/ 나의 가장 나중 지니인 것도 오직 이뿐/ 아름다운 나무의 꽃이 시듦을 보시고/ 열매를 맺게 하신 당신은/ 나의 웃음을 만드신 후에/ 새로이 나의 눈물을 지어 주시다’라고 노래했다.

박용래 또한 ‘그 봄비’에서 ‘오는 봄비는 겨우내 묻혔던 김칫독 자리에 모여 운다/ 오는 봄비는 헛간에 엮어 단 시래기 줄에 모여 운다/ 하루를 섬섬히 버들눈처럼 모여 서서 우는 봄비여’라고 노래했다.

모두 절창이다. 울음과 눈물의 경지를 이처럼 아름답게 끌어올린 그들의 심연에 경의를 표하지 않을 수 없다.

가왕 조용필은 ‘그 겨울의 찻집’에서 ‘뜨거운 이름 가슴에 두면 왜 한숨이 나는 걸까/ 아 웃고 있어도 눈물이 난다/ 그대 나의 사랑아’라고 절규한다.

이 또한 눈물의 의미에 대해 생각하게 하는 아름다운 노랫말이다.

인간이 태어날 때 제일 먼저 하는 일이 울음이다.

울음으로써 자신의 존재를 알리고, 허파로 숨을 쉬기 시작한다. 뿐만 아니라 한생을 살다가 귀천할 때도 눈가에 이슬을 남긴다.

그러므로 울음과 눈물은 영원한 노스탤지어다.

울면 눈물이 나고, 눈물이 나면 운다.

이처럼 울음소리는 입을 통해, 눈물은 눈을 통해 표출되지만, 둘 다 인간의 깊은 심연에서 생성되어 나온다.

눈은 얼굴의 핵심이며, 자신을 알리는 작은 공간이자, 자신의 발가벗은 모습이다. 그래서 인간 양심의 진수는 눈을 통해 흘리는 눈물이다.

어린아이의 눈물은 순수무구 그 자체이나, 나이가 들수록 순수의 순도가 떨어지고 눈물샘도 말라간다.

때론 악어의 눈물이라는 위선의 눈물이 세상을 더럽히기도 한다.

눈물을 방어수단으로 삼는 그런 무리들로 인해, 눈물조차 믿을 수 없는 세상이 되고 말았으니 가슴시리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운다.

슬퍼서 울고 기뻐서 울고, 보고 싶어 울고 그리워 울고, 섭섭해서 울고 불쌍해서 울고, 감동 먹고 울고 감격해서 울고, 억울해서 울고 분해서 울고, 깊은 연민에 운다.

이처럼 사람들은 자신의 처지와 심경 때문에 운다. 실컷 울고 나면 몸과 마음이 정제되고 가벼워진다.

하지만 진정 가치 있는 눈물은 타인과 공동체를 위해 흘리는 더운 눈물이다.

힘없고 멸시받는 소외된 이웃들과 아픔을 함께하며, 그들의 눈물을 닦아주며 함께 울어주는 이가 있다.

또한 세계평화와 사회정의와 민주주의를 위해 스스로 십자가를 지고 속울음을 우는 이도 있다.

그들이 바로 시대의 의인이며, 이 땅의 천사들이다.

눈물에는, 눈물방울에는 흘리는 이의 정한과 애틋함이 녹아있다.

그러므로 눈물을 사랑한다.

측은지심이 있는 눈물을 사랑한다. 여자들의 하염없는 눈물도, 사나이들의 뜨거운 눈물도 사랑한다. 아니 감동이 있는 그 어떤 눈물도 사랑한다.

눈물에는 세균을 죽이는 라이소자임이라는 성분과 짠맛을 내는 나트륨만 있는 게 아니라, 인간의 오장육부와 심연에서 나오는 저마다의 애틋한 정서도 들어 있다.

가끔씩 속울음을 운다.

후회스러워서 울고, 미안해서 울고, 지은 죄 때문에 운다.

정말이지 때론 짐승처럼 괴성을 지르며, 큰 소리로 엉엉 울고 싶을 때가 있다.

허나 바보처럼 애써 속울음을 운다. 우는 것조차 사치스럽고 부끄러워 속으로 우는 거다.

울고 싶을 때는 울어야 한다.

울어야할 때 울지 못하고, 눈물 흘려야 할 때 눈물 흘리지 못하는 건, 분명 비극이고 장애다.

그대여! 울고 싶으면 지금 울어라. 그리고 눈물도 펑펑 흘려라.

/편집위원·문화비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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