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그네와 동백꽃
나그네와 동백꽃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2.02 20:0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역마살(驛馬煞)이라도 낀 것일까? 한 곳에 정착하지 못하고 몇 달이면 이곳저곳 거처를 옮겨 다니며 평생을 사는 사람들도 간혹 있다. 타고난 팔자 탓이라고 한다면 자의(自意)로 떠도는 것이니 그러한 타향살이야 감수(甘受)할 만하다고 보아야 한다. 그러나 귀양살이처럼 순전히 타의(他意)에 의한 타향살이는 여간한 인내심을 갖지 않고는 견디기 어려운 생활의 연속일 수밖에 없다. 조선(朝鮮)의 시인 정약용(丁若鏞)은 반평생을 유배지(流配地)를 떠돌아야 하는 기구한 신세였다. 시인의 고단한 타향살이에 위안이 된 것은 바로 동백꽃 한 송이였다.
 
◈ 나그네 속마음(客中書懷)
北風吹我如飛雪(북풍취아여비설) : 북풍이 흰 눈처럼 날리어 내게 불어오고
南抵康津賣飯家(남저강진매반가) : 나는 남으로 강진 땅 주막에 와있네
幸有殘山遮海色(행유잔산차해색) : 다행히 끄트머리 산들이 바다 빛을 막아주고
好將叢竹作年華(호장총죽작연화) : 대나무밭을 한 해의 꽃으로 삼으니 얼마나 좋은가?
衣緣地瘴冬還減(의연지장동환감) : 당 풍토병이 심하여 옷은 겨울에 더 벗어야 하고
酒爲愁多夜更加(주위수다야갱가) : 근심이 많아 밤에는 더욱 술을 마시네
一四纔能消客慮(일사재능소객려) : 나그네 수심을 삭혀주는 한 가지 일
山茶已吐臘前花(산다이토납전화) : 동백나무 섣달 전에 이미 붉은 꽃을 토해내고 있네.
 
※  철이 겨울인지라 바람이 북쪽에서 불어오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런데 시인에게는 이 겨울바람이 예사롭지 않게 느껴지는데 그 이유는 이때 시인이 가장 남쪽 땅인 강진에 와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북쪽에 있는 한양에서 유배(流配)되어 온 것이다. 그래서 북풍에 예민해지고 그것이 날리는 눈처럼 느껴진 것이다.

낯선 남쪽 땅 강진에서 얼마 전까지 살았던 북쪽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맞게 되니 시인의 마음은 착잡하기 이를 데 없었다. 그래서 시인이 찾은 곳이 주막이었다. 술 한 잔으로 마음을 달래기 위해서였다. 술 한 잔을 하고 나니 주변에 시인의 쓸쓸함을 달래주는 고마운 존재들이 눈에 들어왔다. 변방의 느낌을 극대화시키는 바다의 느낌을 가려주는 땅끝의 산들과 꽃이 없는 삭막한 겨울에 꽃 노릇을 대신하는 대나무밭이 그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잠깐이다. 낯설고 거친 환경에 시인은 심신이 피곤할 수밖에 없었다. 당장 문제가 되는 것은 풍토병이었다. 이로 인해 추운 겨울임에도 도리어 옷을 끼워 입을 수가 없어 몸이 추워서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몸만 고생이 아니다. 유배(流配)를 당한 처지인지라 마음고생이 없을 수 없으니 밤이면 술을 달고 살 수밖에 없다. 이처럼 고달픈 삶을 영위해 가는 시인의 마음을 위로해 준 것은 다름 아닌 동백꽃이었다. 아직 섣달도 되기 전인데 붉은 꽃송이를 환하게 피웠으니 말이다.

사람이 살다 보면 낯설고 험한 곳에서 심신이 고달픈 삶을 살아야 할 때가 있게 마련이다. 이럴 때 낙담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주변을 살펴보면 의외로 정겹고 따스해서 객고(客苦)를 달래주기에 부족함이 없는 반가운 존재들이 있다. 아무리 어려운 처지일지라도 스스로를 위로하는 방법을 터득하고 있다면 일시의 시련을 잘 견뎌내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