을미년 신년 문화답사 소회(所懷)
을미년 신년 문화답사 소회(所懷)
  • 심억수 <시인>
  • 승인 2015.02.02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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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심억수 <시인>

지난 주말 청주문화원에서 을미년 새해를 맞이하여 실시한 신년 문화답사로 추사 고택과 학암포 그리고 태을암을 다녀왔다. 

추사 김정희 선생은 칠십 평생 열 개의 벼루와 일천 개의 붓을 소진하였다. 그는 가슴속에 오천 권의 문자가 있어야 비로소 붓을 들 수 있다 하였으니 알량한 나의 삶에 얼굴이 화끈했다. 또한, 추사 고택 건물 기둥에 다양한 서체의 주련 중 ‘고회부처아녀손(高會夫妻兒女孫)’은 나의 마음에 화두로 자리했다. 가장 훌륭한 모임은 부부 아들딸 손자의 모임이라는 추사의 글귀 앞에서 나는 내 가족에게 참다운 사랑을 주었는지 그리고 나는 가족에게서 참다운 사랑을 받았는지 나에게 묻는다면 어떻게 대답할 수 있을까? 젊었을 때는 가족을 위하여 열심히 일한다는 핑계로 밖으로만 돌면서 그것이 당연한 가족 사랑이라고 생각했다. 

학암포로 향하는 나의 마음은 6대 종손의 가부장적인 행동으로 가족에게 많은 상처를 주었다는 미안함에 가족을 사랑할 수 있는 순간이 바로 지금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학암포 푸른 바다의 포용력을 닮으려는 마음과 가족의 안녕을 소지에 적었다. 소지(燒紙)란 민속에서 부정을 없애고 신에게 소원을 빌기 위하여 흰 종이를 태워 공중으로 올리는 일이다. 소지는 단순히 종이를 태우는 것이 아니고 어떤 물질을 신에게 바친다는 의미가 있기도 한다. 보이지 않는 신에게 물질 그 자체를 바치는 것은 인간 중심의 사고라고 할 수 있다. 신에게는 보이지 않는 것을 바친다는 사고구조에서 소지의 중요한 의미가 있다. 즉, 종이 자체는 물질이지만 종이를 태움으로써 물질에서 보이지 않는 것으로의 승화를 통하여 신에게 바칠 수 있다는 생각이다. 

신년 소지 행사의 인사말로 류 원장께서 청주문화원 가족 여러분 청양의 해를 맞아 비우며 살자고 한다. 채우기보다는 비우기가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비워야 한다는 말은 잘하지만 정말로 비우려고 노력은 하지 않았다. 남보다 더 많이 돈을 모으고 싶었고 다른 집 아이들보다 우리 아이들이 모든 일에 더 잘하길 바랐다. 

사회에서는 다른 사람보다 인정받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하다못해 나의 아내가 현모양처로 아름다우며 살림을 잘한다고 자랑하고 싶었다. 나보다 못한 사람을 보면 게으르거나 현명하지 못하여 그렇다고 치부하며 외면하기도 했다. 남을 돕는 일에는 인색했으며 내 그릇 채우는 일에 급급했다. 참으로 욕심스럽게 채우며 살았다는 생각이 든다. 그런데 비우란다. 이제껏 채우는 일에 온 마음을 다 썼다 마음을 비워야 다시 채울 수 있고 비워야 정체되어 부패하는 것을 막을 수 있다. 지금껏 비우지 못하고 살아온 나의 내부는 조금의 여유도 없이 꽉 들어찬 채움으로 인하여 부패하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다른 사람들은 썩은 냄새가 나는 나를 인식할 것이지만 나만 모르고 활개를 치고 다니는 것은 아닐까 두렵다. 

태을암 마애삼존불상을 찾아가는 발걸음이 무겁다. 우리나라에 최초의 마애삼존불 앞에서 비움의 미학을 구하며 삼배를 드렸다. 해는 서산에 붉은 비단 조각을 펼치고 있다. 노을 따라가는 땅거미가 야속하지만, 오늘이라는 시간, 잡을 수 없기에 추억이라는 이름으로 살며시 놓아 본다. 여행은 지나온 나의 삶을 돌아보며 고백하고 앞으로 살아갈 나의 삶에 대한 독백이다. 이번 문화답사를 통하여 나를 성숙시킨 행복한 자아의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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