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
눈물
  • 이수안 <수필가>
  • 승인 2015.02.0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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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수안 <수필가>

소소한 집안일을 한다. 보거나 안보거나 켜놓은 TV에서는 해묵은 프로그램이 재방송되고 있다. 시어머니팀과 며느리팀이 속마음을 털어놓으며 서로를 이해해 가는 프로그램이다. 그런데 상대편과 유쾌한 승강이를 벌이며 웃음을 주던 다른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에 일손을 놓고 TV 앞에 앉는다.

<언제 부모님이 가장 생각나는가>라는 주제는 분위기를 단숨에 숙연하게 만들어버린다. 사느라 바빠 효도 못 하는 안타까움에 며느리팀이 하나 둘 울먹이기 시작한다. 프로그램을 진행해야 하는 사회자까지도 눈물을 참느라 눈자위가 발그스름해진다. 내 볼에도 눈물이 흐른다.

이 세상에서 부모님만큼 완벽하게 내 편이 되어 주고 나를 이해하며 걱정해주는 사람은 없지 않을까. 그걸 알면서도 나는 고단한 삶을 핑계로 조금만 더 형편이 좋아지면 효도하리라 다짐하며 세월을 허송하고 말았다.

과수원 초기 때의 일이다. 포도농사 기술이 없던 때라 연거푸 몇 해 농사를 잘 짓지 못했다. 그해도 포도나무가 꽃을 잘 피우지 못했다. 나는 혹시 꽃이 좀 잘 피는 곳이 있나 살피느라 아침마다 포도밭을 누비며 이슬에 바짓단을 적시고는 했지만 결과는 참혹했다. 개화기가 끝나고 결실기가 되자 열매는 별로 없고 포도 잎만 무성했다. 포도농사 걱정하며 전화 주신 부모님께는 농사가 잘되었다고 거짓말을 해놓은 상태였다.

들녘에서 모내기가 한창일 즈음 나는 밭에서 포도나무 순을 따고 있었다. 그해 농사는 망쳤지만 다음 해를 위해서는 나무를 잘 가꾸어야 했기 때문이다. 하필이면 참으로 맥 빠지는 일을 하고 있을 때 난데없이 아버지가 포도밭에 나타나셨다. 경북 영천에 계셔야 할 아버지가 경기도 평택 딸네 집 포도밭에 연락도 없이 오신 것이다. 예삿일이 아닌 것이 분명했으나 아버지는 당신의 사정은 내색하지 않으셨다. 다만 포도나무를 보고 너무 놀라 낯빛이 몹시 어두워지셨다.

내가 시집오기 전에 부모님은 장남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셨다. 알코올 중독 증세의 아들을 둔 죄 때문에 며느리를 볼 면목이 없는 부모님이었다. 동네에서도 가장 올곧았으며 열심히 사신 부모님. 그러나 술에 절어 사는 장남의 존재는 부모님의 얼굴에 웃음기를 걷어내고 깊은 그늘을 드리우게 했다. 참으로 말할 수 없이 힘든 고초를 겪으면서도 자식이 정신 차릴 날이 오리라는 희망을 놓지 않으며 모진 세월을 사셨다. 세상 사람이 다 손가락질 한다 해도 자식을 향한 애정을 끝내 놓지 않은 부모님이셨다.

그 여름 아버지가 우리 집에 오신 것은 친정에 무슨 사건이 있었고 잠시라도 이런저런 복잡한 일에서 벗어나 위로를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나는 포도농사를 그 지경으로 지어 위로는커녕 상심만 더해 드리고 말았다. 몇 년째 형편이 그 모양이었으니 당연히 여비 한 푼도 못 드렸다. 딱 한 번 딸네 집을 찾은 아버지께 실망만 안겨드렸고 그 후로도 발걸음을 못하시고 세상을 뜨셨으니 내가 저지른 불효를 어찌 다 말할 수 있으랴.

TV에서는 이제 시어머니팀의 이야기를 들을 차례다. 부모님이 이미 하늘로 가셔서 효도할 기회마저 잃은 시어머니팀의 안타까움은 네편 내편 없이 모두를 울게 한다. 출연진은 물론 사회자까지 우는 통에 화면에는 온통 눈물바다로 가득하다.

진즉에 마음에 차는 효도 한 번 속 시원히 못한 설움이 차올라 나도 꺼이꺼이 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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