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역사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4)
청주 역사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4)
  • 김영미 <청주시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5.02.01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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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청주시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향약을 만든 율곡이 그 당시 건강이 좋지 않아 이듬해 청주목사를 사임하고 해주로 낙향하여 서원향약은 안타깝게도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늘날 지방자치의 정신과 같은 것이어서 청주는 우리나라의 지방자치를 가장 먼저 실시한 고장이라 할 수 있다.

이 밖에도 중앙공원에는 비석의 형태를 갖추지 않은 통비로 된 척화비가 있다. 척화비는 조선 고종 때 서양 제국주의 세력이 들어오는 것을 경계하기 위하여 세운 것이다. 1866년 프랑스군대가 천주교 박해에 항의하여 인천까지 침입한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은 화친과 교역을 반대하는 글을 발표하여 쇄국의 의지를 강하게 밝혔다.

그 후 1871년 평양에 무단 침입한 미국상선 셔먼호를 불태운 사건을 계기로 강화도에서 미국과 격렬한 싸움이 일어났는데(신미양요) 싸움에서 이겨 자신을 얻은 대원군은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하여 전국의 중요 도시에 척화비를 세웠다.

1882년 임오군란으로 흥선대원군이 실각하여 청으로 쫓겨가자 일본의 요구로 모두 철거했으나 일부가 남아 있는데 청주의 중앙공원에도 있다.

비문의 내용은 양이침범(洋夷侵犯) 비전즉화(非戰則和) 주화매국(主和賣國).

“서양 오랑캐가 침범하였는데 싸우지 않으면 화친을 주장하는 것이고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라는 내용의 글이 쓰여 있다. 원래의 위치는 알 수 없고 양(洋)자와 즉(則)자가 멸실되었으며 1976년 석교동 개인집 앞 하수구 뚜껑으로 있던 것을 옮겨 온 것이라고 한다.

북쪽 출입구 쪽에는 1967년 건립한 “의병장 한공봉수송공비”가 있다. 북일면 세교리가 고향인 의병장 한봉수는 일제강점기 때 충청도와 경상도, 강원도 일대에서 30여 회의 유격전으로 의병 투쟁을 벌였던 분으로 ‘번개대장’의 칭호를 받았다. 3·1운동 당시 서문장터와 세교리 내수장터에서 학생들과 만세시위 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1919년 5월 6일 서울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고를 치렀던 의병장이다.

지금 중앙공원은 어르신들이 삼삼오오 모여 과거 추억담을 풀어놓는 만남의 장소로 한몫을 하고 있지만 이렇게 선조들의 숨결과 체취가 느껴지고 역사와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공원이다. 청주 역사의 중심에는 중앙공원이 있다.

방학인데도 중앙공원이 한산하다. 아이들 손잡고 가까운 유적지를 찾아 체험학습도 시켜보고 우리 고장의 역사를 바로 알게 하는 시간 속으로의 여행을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 방학을 통해 실제 삶 속에서 역사를 체험하고 느껴보게 하면서 자연과 함께 어울리며 느긋하게 스스로를 키워가게 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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