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인생
어떤 인생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1.26 1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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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사람은 저마다 먹을 것을 가지고 태어난다고 한다. 그러나 어떤 사람에게는 가난이 숙명처럼 붙어다닌다. 도대체 이유는 무엇일까? 부모를 어떻게 만나는가에 따라서 빈부가 결정되는 것일까? 꼭 그렇지만도 않다. 그렇다면, 부지런하면 부자가 될까? 꼭 그런 것도 아니다. 그러면 모든 것이 운명일까? 여기에 대한 답은 있을 수 없다. 정답은 사람들은 모두 다 가난하게 산다는 것이다. 그것이 물질이든 정신이든 말이다. 송(宋)의 시인 양만리(楊萬里)는 우연한 기회에 길을 지나다 어떤 인생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가난한 인생이었을까?

길가 점포(道傍店)

路傍野店兩三家(노방야점량삼가) : 길가에 시골 가게 두세 집

淸曉無湯況有茶(청효무탕황유다) : 새벽에 뜨거운 물 없는데 하물며 차가 있으랴

道是渠 不好事(도시거농불호사) : 이렇다고 그 사람 게으르다고 말하지 말라

靑瓷甁揷紫薇花(청자병삽자미화) : 청자꽃병에는 백일홍이 꽂혀 있다네

어느 길인지 모르지만 시인은 길을 가고 있었다. 휑한 들판에 길옆으로 점포들이 두세 집 들어서 있다. 길을 가다 보면 만나는 흔한 광경이고 십중팔구 허름한 모습이지만, 처한 상황에 따라서는 반갑기 그지없을 때가 있다. 지금 시인이 똑 그렇다. 집 하나 사람 하나를 만날 수 없는 허허벌판을, 그것도 밤을 새워 걸은 끝에 새벽에 만난 사람의 집이란 얼마나 반가운가? 허름한 시골집이라 변변히 문도 닫지 않았던지 시인은 주인도 부르지 않고 그냥 집으로 들어섰다. 이른 새벽인지라, 맞아 줄 사람이 있을 리 없다. 억지로 깨워서 불렀지만, 아직 준비한 것이 아무것도 없다. 손님이 오면 늘 내놓게 되어 있는 차이지만, 아직 이른 새벽인지라, 물조차도 끓이지 않았다. 그러니 차가 있을 리 없다. 평소 같았으면 차를 가져오라고 득달을 했겠지만, 워낙 이른 시간인 걸 아는지라 시인은 아무 타박을 하지 않는다. 타박을 하기는커녕 뜨거운 물 한잔 없는 그 집이 마냥 좋기만 하다. 피곤한 몸을 쉴 수 있는 것만으로도 시인은 충분히 만족했을 것이다. 손님이 와도 본 송 만 송 제대로 내다보지도 않는 주인이, 평소 같으면 괘씸했겠지만, 지금은 전혀 그렇지 않다. 차를 다려낼 물을 끓여 놓지 않은 것을 보면 주인이 게으르다고 간주할 법도 하지만, 시인은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데, 여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탁자 위에 청자(靑瓷)로 만든 병이 하나 놓여 있었고, 거기에는 자미(紫薇)라고도 불리는 백일홍(百日紅)이 꽂혀 있었던 것이다. 정갈한 꽃병에 꽂힌 꽃 하나로, 이곳 주인의 부지런한 품성을 단박에 읽어낸 시인의 안목에는 짙은 감성이 배어 있다.

정처 없이 길을 가는 나그네에게 길가의 집이란 그 자체로 반가움이다. 하물며 밤을 새워 길을 걷던 나그네에게라야? 비록 집 안에 끓는 차가 아직 준비는 되지 않았다 해도 말이다. 여기에 정갈하게 닦은 꽃병에 꽃이 싱싱하게 꽂혀 있기까지 하다면, 이런 집을 만난 나그네는 여간 행운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여기서 정작 눈여겨봐야 할 것은 나그네의 행운이 아니라, 집주인의 근면한 성품과 삶에 대한 묵묵하고 진지한 자세이다. 길가의 허름한 집일지라도 이처럼 부지런한 심성으로 주어진 삶을 묵묵히 살아 내는 것만으로 그 인생은 충분히 성공한 것이고 충분히 부자가 된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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