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역사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3)
청주 역사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3)
  • 김영미 <청주시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5.01.25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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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청주시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충청병영의 수장으로 이름을 남긴 사람은 영조 4년 이인좌의 난이 일어났을 때 반군에 저항하다 죽은 충청병마절도사 이봉상과 영장 남연년이다. 

이봉상은 영조 4년(1728년) 이인좌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작은아버지 홍무와 함께 반란군에 붙잡혀 죽었다. 충청감영에 들어온 이인좌가 이봉상에게 항복할 것을 권하였지만 충무가(忠武家)의 충의를 내세워 끝내 굽히지 않았다고 한다. 어사 이도겸이 청주로부터 돌아와 그 순절을 전하자 영조는 정려를 세우고 좌찬성에 추증하였으며 후에 헌종이 청주에 표충사를 세워 제향하게 하였다.

병마절도사 영문 앞에 서 있는 은행나무도 청주읍성의 오랜 역사를 말해주는 살아있는 전설이다. 뿌리가 오리발 모습이라 하여 압각수(鴨脚樹)라 불리는 이 나무는 수령이 900여 년에 달하는 것으로 충신을 살린 나무로도 유명하다.

「고려사」와「동국여지승람」등 고문서에 나온 이야기다. 고려 말 공양왕 2년(1390년) 위화도에서 회군한 이성계세력이 실권을 잡고 있을 때의 일이다. 윤이와 이초가 명나라에 가서 고려를 쳐서 이성계 일파를 제거해 달라고 청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에 이성계는 반대파인 이색, 권근, 이숭인 등이 관련되어 있다며 이들을 청주옥에 감금시키고 문초를 하게 하였다.

그런데 문초를 하던 중 청주에 전례 없는 큰비가 내렸다. 비가 얼마나 내렸는지 무심천이 범람하여 청주성의 문이 무너지고 관가와 민가가 모두 물에 잠겼다. 

이때 문초를 하던 관리들과 문초를 받던 죄인들이 앞마당에 있는 은행나무 위로 대피하여 목숨을 구했다. 이 소식이 왕에게 전해지자 왕은 하늘이 그들에게 죄가 없음을 밝혔다고 하며 석방하도록 하였다. 그 은행나무가 바로 압각수이다. 이때 풀려난 권근이 지은 시가 압각수 옆에 서 있는 시비에 새겨져 있다. 

언불행급주공 (流言不幸周公) 근거없는 소문으로 주공에게 불행이 미쳐

홀유가화언대풍(忽有嘉禾偃大風) 갑자기 큰바람이 일어 벼를 쓰러뜨렸네

문도서원홍수창(聞道西原洪水漲) 청주에 큰 물이 넘쳤다는 말을 듣고

시지천의고금동(是地天意古今同) 하늘의 뜻이 고금을 통해 예나 지금이나 같은 것을 아네



압각수는 알고 있지 않을까. 천 년의 세월을 간직한 청주의 이야기를….

중앙공원에는 커다란 오석(烏石)에 서원향약을 기록한 비(碑)가 있다. 이 비가 서원향약비인데 쉽게 말해서 조선시대 자치규약이다. 조선 선조 4년(1571년) 청주 목사였던 율곡 이이가 부임한 그해 가을에 서원향약을 만들었다. 전통의 미풍양속을 계승하고 악한 것을 경계하는 우리나라 향약의 표본으로써 양반과 천민을 구별하지 않고 청주 지방의 전체 백성을 대상으로 입약(立約)실시하였다. 

계형식을 빌려 도계장, 계장, 동훈회, 색장 등의 임원을 두고 권선징악의 세칙을 만들어 지키도록 하였는데 이때 실시한 서원향약은 조선 후기 전국 각지에서 시행된 향약의 모태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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