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미학
슬픔의 미학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5.01.19 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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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회자정리(會者定離)요 거자필반(去者必返)이라 했던가? 법화경(法華經)의 말을 빌지 않더라도 사람의 삶이란 만남과 헤어짐으로 점철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요즘처럼 교통과 통신이 발달한 시대라도 이별은 어쩔 수 없이 슬픈 일일 수밖에 없으니 하물며 한 번 헤어지고 나면 깜깜 무소식이던 시절에야 말할 나위도 없을 것이다. 정든 고향, 정든 사람들과 헤어지면서 느끼는 소회(所懷)를 담담하게 읊은 이별시는 시공(時空)을 초월해 사람들의 심금을 울리기에 충분하다. 당(唐)의 시인 두목(杜牧)에게도 이별은 피할 수 없는 일이었다. 

증별(贈別)

多情卻似總無情(다정각사총무정) : 다정함이 도리어 무정함과 같아
惟覺樽前笑不成(유각준전소불성) : 술항아리 앞에서도 웃음이 안 나옴을 느낄 뿐이네
蠟燭有心還惜別(납촉유심환석별) : 촛불이 마음이 있어 도리어 이별을 애석해 하여
替入垂淚到天明(체입수루도천명) : 대신 방에 들어 눈물 흘리다 새벽이 되었네

이별이라고 다 같은 이별은 아니다. 헤어져도 그만인 무덤덤한 이별이 있는가 하면 헤어지면 도저히 견딜 수 없을 것 같은 애절한 이별도 있다. 사람들은 무덤덤한 이별에 슬픔을 못 느끼고 애절한 이별에 큰 슬픔을 느낄 것 같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니다. 헤어질 때는 너무 아쉬워 울고불고 했지만 막상 이별 뒤에는 상처가 쉽게 아무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그 반대의 경우도 있다. 

꿈속에서도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이별을 갑작스레 당하게 되면 사람들은 도리어 슬픔을 느끼지 못한다. 결코 슬프지 않아서가 아니다. 슬픔조차 느끼지 못 할 정도로 충격이 크기 때문이다. 시인은 지금 심각한 이별의 장면에 놓여 있다. 만감이 교차해야 맞지만 도리어 아무런 감정도 들지 않고 무덤덤하기만 하다. 마치 감각이 마비된 듯한데 단 하나 느껴지는 것은 이별을 위해 준비한 술동이 앞에서 웃으려 해도 웃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속으로는 아무리 슬프더라도 적어도 겉으로는 떠나는 사람을 위해 기꺼이 이별주를 나누고 웃음을 지어야 한다. 보통의 이별이었다면 시인도 아마 그러했을 것이다. 그러나 전혀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 그렇다고 운 것도 아니다. 충격이 커서 눈물조차 흘릴 수 없었던 시인을 대신해 눈물을 떨어뜨린 것은 이별의 자리를 밝히기 위해 피워 둔 촛불이었다. 무심(無心)한 촛불에게 마음이 있어 도리어 이별을 애석해 하는데 평범하게 애석해하는 것이 아니다. 웃지도 울지도 못하는 시인을 대신해 방에 들어와 하염없이 눈물을 드리운다. 그것도 밤을 꼬박 새워 새벽이 올 때까지 말이다. 밤새 켜 놓은 촛불에서 떨어지는 촛물을 이별을 슬퍼해서 흘리는 눈물이라고 읊은 시인의 감수성이 참으로 예민하다. 울음조차 나오지 않는 이별의 슬픔을 촛불을 빌어 형상화한 시인의 솜씨가 탁월하다.

슬프기 짝이 없는 이별 앞에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다면 사람이 냉정해서 그런 것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도리어 그 반대인 경우가 많다. 큰 슬픔 앞에서 초연하기란 쉽지 않다. 무덤덤한 듯 보이지만 그 내면에는 충격 때문에 잠시 감춰진 커다란 슬픔이 자리 잡고 있게 마련이다. 눈물조차 나오지 않을 때 사람을 대신해 울어 줄 무언가가 있다면 그나마 큰 위안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슬픔도 감동을 만나면 아름답기 마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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