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장대를 오르며
문장대를 오르며
  • 이효순 <수필가>
  • 승인 2015.01.11 1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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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가는대로 붓 가는대로
이효순 <수필가>

오리 숲을 지나 등산로에 접어든다. 얼음장 밑으로 흐르는 맑은 물소리에 발걸음이 가볍다. 신선한 바람과 맑은 공기, 추위도 잊고 어느덧 그 산과 나는 하나가 된다.

산을 좋아하지만 속리산처럼 여러 번 가본 곳은 없다. 찾을 때마다 말없이 서 있는 숲이 시절에 따라 그 모습을 다르게 연출하며 나를 맞아 주었다. 힘겹게 한 겨울 산행이었지만 지난 시간을 되돌아보는 시간이었다.

낡은 앨범을 펼치니 겨울나무 원줄기가 힘차게 뻗어 있다. 그 아래 흰 눈을 배경으로 찍은 흑백사진에 젊은 날이 곱게 배어난다. 처음으로 찾은 속리산의 기념사진이다. 친구와 나란히 눈밭에서 포즈를 취한 모습이 싱그럽다.

지나간 세월 속에 내 삶이 묻어난다. 흰 눈을 비집고 푸른 잎사귀를 드러낸 조릿대는 하얀 겨울 산과 함께 정겹게 앉아있다. 속리산과의 만남이 처음으로 시작된 것이다.

오래전 남편과 처음 맞선을 보고 가을 연휴에 찾은 곳이다. 만난 지 두어 달 지났는데 그는 속리산을 가자고 했다.

곱게 물든 가을 산은 비단처럼 화려했다. 산은 오색단풍으로 젊은 남녀의 마음을 설레게 했다. 분주한 직장생활에 단련되지 않은 다리로 산을 오르는 것은 무리였다. 가을 정취에 취하여 파란 물빛 같은 하늘을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넓은 품 안처럼 편안한 곳, 등줄기와 이마에서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았다.

바위가 먼 하늘에 닿을 듯 솟아있다. 있는 힘을 다해가며 문장대를 향해 가는 발걸음, 내 긴 삶의 여정으로 생각되었다. 문장대에 올라 펼쳐지는 봉우리를 경이롭게 바라보았다. 아무 말 없이 전해지는 자연의 숨소리, 마음을 맑게 씻어주었다.

그후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생활하면서 다시 직장에 가게 되었을 때 남편은 부임하기 전에 속리산으로 나를 안내했다.

나를 만나 처음 오르던 그곳이 생각났던 모양이다. 아마 새로운 다짐을 하는 뜻으로 배려한 것 같았다. 한동안 아이들과 함께 지내며 산을 오르는 것을 잠시 잊고 살았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삶의 변화가 있을 때마다 문장대를 오르며 새로운 다짐을 하곤 했다. 어수선한 마음을 정리하고 문장대를 오르며 씻어 보자는 것이다. 흐른 땀을 닦아내듯이 마음의 모든 찌꺼기들을 씻어내고 새로운 시작을 하기로 했다.

여러 해가 지났지만 산은 그대로 그곳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무 원망도 없이 묵묵히 감싸며 친정어머니가 딸을 반기듯 속리산은 세월의 때 묻은 나를 깨끗이 씻어주었다. 그 돌, 계단, 멀리 보이는 산봉우리 모두 옛 모습 그대로였다. 숲은 더 울창해지고 성숙되어 있었다.

쌍둥이 아들이 ROTC 장교로 임관받기 전 우리는 둘이 오르던 문장대를 아이들과 함께 찾았다. 겨울의 등산로는 흙이 보이지 않는 하얀 세계였다. 소나무와 조릿대, 가끔 큰 나무줄기의 끝에 붙어 있는 겨우살이가 우리들을 반겼다. 동작 빠른 다람쥐의 눈 맞춤도 빼놓을 수 없는 겨울 산의 이벤트였다. 겨울의 칼바람에 흔들리는 조릿대의 푸른 속삭임은 사회로 첫발을 내딛는 쌍둥이를 축하해주는 노래였다.

힘겹게 문장대를 오르는 것처럼 새해를 한 걸음씩 밟아간다. 평안한 마음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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