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탄주와 가성 친밀감
폭탄주와 가성 친밀감
  • 양철기 <충북학생외국어교육원 연구사·박사·교육심&
  • 승인 2015.01.08 1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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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보는 세상만사

양철기 <충북학생외국어교육원 연구사·박사·교육심리>

폭탄주(Bomb shot)는 제정 러시아 때 시베리아로 유형간 벌목 노동자들이 추위를 이기기 위해 보드카를 맥주와 함께 섞어 마신 것이 기원이라고 알려졌다. 우리나라에는 1970년대 미국에 유학간 군인들이 들여와 확산됐으며 1980년대 초 정치에 나선 군인들이 정치계와 법조계, 언론계 인사들과의 술자리에서 만들어 마시면서 음주문화의 한 형태로 자리 잡았다고 한다. 이후 접대문화가 활성화 되면서 종류도 다양해졌는데 대략 50여가지 폭탄주(원자탄주, 수소탄주, 삼색주, 뽕가리주 등) 제조법이 전수되고 있다. 

두가지 술이 섞이며 오르는 거품이 원자폭탄의 버섯구름 같아서 지어진 이름만큼이나 거친 술로 패가망신은 물론 종종 목숨까지 앗아가지만 뿌리치기 힘든 마력을 지닌 치명적인 유혹의 술 폭탄주. 썰렁한 분위기 회식자리에서 누군가 “한잔 말아야죠”하면 소주에 맥주를 탄 ‘소맥’ 폭탄주가 돌아간다. 묘하게도 몇분안에 방 안에 떠돌던 어색함이 눈 녹듯 사라지는 마법이 일어난다.

왜 우리는 폭탄주를 즐겨 마실까? 정신과의사 하지현 박사는 폭탄주가 좋은 것은 빠르게 취하기 때문만이 아니라 관계 맺기의 약점을 보완해 주는 면이 있다고 분석한다. 폭탄주는 대개 한명이 조제를 하는 데 일정한 양을 모두에게 평등하게 분배한다. 다같이 한잔씩 하거나 순서대로 예외 없이 잔이 돌아간다. 한번에 쭉 들이키고 다 마셨다는 소리를 내거나 빈 잔을 머리 위에 털기도 한다. 투명한 평등주의적 자세를 집단의 힘으로 강제하는 것이 폭탄주 문화의 핵심 중 하나다. 

폭탄주(爆彈酒)의 평등주의 실현 다음으로는 집단 내 결속을 강화하면서 개인적 취향이나 차이를 일시적으로 정지시키는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성의 단계로 진행한다. 흡수력이 빠른 평등한 폭탄주를 순서대로 마시면 대뇌의 중추신경은 쉽게 무장해제가 된다. 따라서 어색함, 도덕심, 눈치 보기 등이 사라지고 충동적이며 공격적인 원초적 본능에 충실해져 집단 퇴행상태에 빠져 ‘우리는 하나’라는 동질성을 확인한다.

그런데 진짜 친하고 애틋한 사이의 사람들은 폭탄주를 자주 마실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폭탄주를 나누는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이들은 그다지 서로 친하지 않고 별로 친하고 싶어 하지도 않는 관계일 경우가 많다. 이들은 여러 이유로 서로 간에 ‘우리는 친하다’는 최면을 걸어야만 하는 상황에 처해 있는 경우가 많다. 거래를 성사시키기 위해서, 조직 개편으로 새로 만들어진 부서원끼리 본능적으로 친해질 필요성이 있을 때 등등.

하지현 박사는 폭탄주는 친해야 하는 사명감과 친해지고 싶지 않은 개인적 욕구 사이의 딜레마를 저비용으로 해소해 주는 솔로몬의 지혜라고 했다. 다양한 사람이 만나는 낯선 자리에서 어색함을 녹이는 데 이만한 돌격대가 없는 것 같다고 했다. 사람과 친해지려면 대화를 많이 나누고 취향을 살피며 성격까지 맞춰야 한다. 하지만 이런 정공법은 시간이 오래 걸린다. 자칫 함께 할 사람이 못 된다는 결론에 도달할 가능성도 있다. 특히 일단 ‘우리는 친하다’는 최면을 걸어야 하는 상황에선 이런 정공법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이때 폭탄주가 필요하다. 가까워졌다는 느낌과 개인의 정체성 유지라는 딜레마에 놓일 때 폭탄주는 편리하게 ‘가성 친밀감(pseudo-intimacy)’을 만들어 준다. 

연말 폭탄주와 함께 몇번을 장렬하게 전사했지만 따지고 보면 모임에 함께 한 그들과의 만남이 어느 정도 형식적, 가식적이었음을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새해를 맞아 그들과 더 친밀한 관계를 맺고 싶다. ‘섞어라, 마셔라, 뭉쳐라’를 넘어 조용한 찻집에서, 한적한 주점에서, 우아한 와인바에서 그윽한 눈빛으로 진짜 친밀하게 인생을 나누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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