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0년 전 을미년의 역사를 잊지 말자.
120년 전 을미년의 역사를 잊지 말자.
  • 김명철 <충북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사> 
  • 승인 2015.01.06 18:5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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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김명철 <충북교육과학연구원 교육연구사> 
 
지난 2014년 갑오년은 너무나 많은 사람에게 상처와 시련의 아픈 기억을 많이 남겨 주었다. 때문에 을미년 새해는 모든 사람들에게 희망과 용기를 주는 ‘푸른 양의 해’가 더없이 반갑고 기대가 된다.

그러나 과거 을미년의 역사는 그렇게 우리에게 좋은 기억으로 남아 있지를 못하다. 역사는 과거를 통해 현재를 살고, 그리고 미래를 열어가는 것이라면 과거의 아픈 기억을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

120년전 1895년에 일어난 3가지 사건을 기억한다. 을미사변, 을미개혁, 을미의병이다.

을미사변은 일본의 계획하에 괴한들이 새벽에 궁궐에 난입해서 조선의 왕비 명성황후를 잔인하게 살해하고, 시체에 불을 질러 없앤 사건이다.

1895년 10월8일 새벽 5시쯤 암호명 ‘여우 사냥’이란 작전으로 자행된 이 사건은 결국 왕비 침실인 건청궁 안의 옥호루를 습격해 왕비를 찾아 살해하고, 시체에 석유를 뿌려 태운 뒤 뒷산에 묻어버린 세계 역사에 전무후무한 만행이었다.

그 후 집권한 친일파가 태양력 사용, 종두법 실시, 우체국 및 소학교 설치, 단발령, 서양식 의복 착용 등을 빙자해서 시행한 을미개혁이 두번째 사건이다.

백성은 갑자기 음력이 폐지되고 양력을 사용하는 데 따른 불만이 컸고, 특히 단발령은 온 국민의 공분을 낳았다. 상투를 자르는 것은 우리의 전통을 무시하고, 혼을 말살하려는 일본의 의도였기 때문이다.

명성황후 시해와 단발령에 크게 분노한 양반 유생들이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최초의 의병이 일어났는데, 이를 세번째 사건인 ‘을미의병’이라 부른다.

제천시 봉양면에 있는 자양영당에 가면 자랑스럽게 의병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제천을 의병의 고장이라 부르는 이유가 바로 전국 최초의 의병이 봉기한 자랑스러운 고장이기 때문이다.

제천의병은 크게 두번 봉기했다. 전기에 일어난 의병은 위정척사 사상의 연장선에 있어 ‘척사의병’ 또는 ‘을미의병’이라 부른다.

당시 유인석은 ‘처변삼사’를 주장하며 전국에 격문을 띄웠다. 처변삼사란 나라가 위험에 처했을 때 의병을 일으키는 것, 망명하는 것, 자결하는 것 중 한가지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인석과 제천의병들은 단양군수 권숙, 청풍 군수 서상기 등 친일개화파 관리들부터 참수했다. 이후 관찰사 세명과 여섯명의 군수를 처단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후기 제천의병은 1907년 고종의 강제 폐위와 군대해산을 계기로 봉기했다. 이른바 정미의병이다.

전국의 의병이 제천으로 모였고, 일본군 1개 소대를 잡기 위해 수천 명의 의병들은 맨손으로, 죽창으로 일본군의 첨단 무기에 대항했다. 의병들은 도적떼로 몰리면서도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쳤다.

나라가 없어지자 후기 의병 대부분은 쓸쓸히 죽거나 자결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일본군에 잡혀 재판을 받았다. 의병들이 사라진 조선은 결국 5000년 민족사가 단절되는 식민지 지배의 불행한 역사를 만들고 말았다.

120년이 지난 을미년 현재 우리의 상황은 어떠한가? 우리는 또다시 일본의 우경화, 중국의 패권주의 틈바구니에 끼어 있지는 않은가? 더욱이 우리는 남과 북으로 분단되어 서로 대치하고 있다.

을미년의 대한민국아! 정신 차리자! 당당하게 을미년의 역사의 수레바퀴를 자동차의 바퀴로 만들어서 멋지게 달려보자. 통일한국의 기초를 닦는 멋진 역사를 을미년에 만들어보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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