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손
빈손
  • 안희자 <수필가>
  • 승인 2015.01.06 18: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生의 한가운데

안희자 <수필가>

아침부터 눈발이 굵어지더니 종일 솜털 같은 눈송이가 다복다복 내린다.

늦은 저녁 외손녀 돌잔치에 초대받았다. 예쁜 조바위를 쓰고 치마저고리를 입은 아이의 모습이 앙증맞다. 풍선은 나비 되어 춤을 추고, 촛불은 붉게 타오르며 세상을 환하게 밝힌다. 마치 아이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듯 천장에서 내리쬐는 은빛 조명이 더욱 빛나고 있었다. 

그 광경을 바라보니 불현듯 아기가 세상에 태어나던 그때가 생생하게 떠올랐다. 만지면 부서질 것 같던 몸집이 작은 아기, 덥석 안아주기도 두려웠는데 이렇게 좋은 날을 맞고 보니 감회가 남다르다.

이어 진행자의 축하메시지와 함께 설렘의 시간이 다가왔다. 바로 돌잡이다. 아기의 첫 생일날 흔히 실, 돈, 따위를 돌상에 차리는데 어느 것을 잡는가에 따라서 그 아이의 장래가 결정된다고 믿어왔다. 모든 이들이 기대에 부풀어 있을 때 녀석이 잡은 것은 판사봉과 돈이었다. 이내 객석에서 웃음소리가 나고 박수소리가 커졌다. 예로부터 내려오는 계보의 소중함도 있지만 장차 큰 그릇이 되라는 어른들의 소망일 것이다.

한낱 풍습에 불과한 것이지만 아이의 돌잡이를 지켜보며 아이에게 기대를 거는 것은 어찌 보면 ‘어른들의 욕심에 의한 행위가 아닌갗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기의 탄생을 기억하는가. 태어날 때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채 빈손을 꼭 움켜지고 세상 밖으로 나온다. 그리고 첫 울음으로 새 생명을 알린다. 아마도 잔뜩 움켜진 손은 물질을 거부한다는 뜻이 아닐는지. 그리하여 갓난아기는 깨끗하고 순연하다.

그러나 아이들은 자라면서 어른들이 원하는 욕심의 그릇에 의해 채워지기도 한다. 그 욕망이 지나친지라 백지 위에 먹물을 끼얹듯 쉽게 물이 든다.

언젠가 TV에서 어느 재벌가의 가슴 아픈 사연을 들은 적이 있다. 모 그룹의 자녀가 남녀관계로 고민하다 자살했다는 것이다. 재벌가문끼리의 혼사가 문제가 되었다. 그녀가 택한 남성이 서민이라는 이유였다. 부모의 그릇된 권위주의가 미래가 창창한 자녀를 죽음으로 몰아세운 건 아닌가 싶다. 사랑하는 선남선녀가 얼마나 가슴앓이를 했으면 죽음을 택했을까? 참 기막힌 일이다. 자녀의 선택을 오직 물질로 흥정하고 있다는 사실에 안타까울 뿐이다. 

처음부터 부모 덕에 여유롭게 누리는 삶이 있는가 하면 빈손으로 시작하여 궁핍하게 사는 삶이 있다. 누구의 도움 없이 혼자 일어서려면 몇 배의 고통이 따르겠지만 성취했을 때의 만족감은 그만큼 클 것이다.

나 또한 빈손으로 출발한 삶이었다. 여기까지 오는 동안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왔다. 알뜰살뜰 살아온 터에 지금은 삶이 편안해졌지만 힘겨울 땐 주저앉고 싶은 날도 많았다. 아무리 발버둥쳐도 쉽게 얻어지지도, 그렇다고 원한다고 되는 것도 아니었다.

뒤돌아보니 나는 비우기보다는 욕심껏 손안에 넣으려 했다. 타인보다 곳간을 더 채우려고 동동거렸다. 눈앞의 이익에만 연연했던 그런 내 손이 부끄럽다. 그리고 깨닫는다. 누구나 생의 끝에선 물욕(物慾)도 부질없는 짓이라는 것을. 

부자거나 가난하거나 우리네 인생은 빈손으로 왔다 빈손으로 가는 것은 아닌지. 태초의 빈손을 기억하며 감사하며 살 일이다. 사랑하는 가족이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행복하지 않은가.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는 박경리 선생의 유고시집이 생각나는 오늘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