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역사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2)
청주 역사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2)
  • 김영미 <청주시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5.01.04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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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청주시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중앙공원에는 누각이 하나 있다. 이곳은 고려와 조선시대에 걸쳐 관리와 문인들이 모여 시문을 짓고, 학문을 논하며 시국을 논하던 망선루이다. 망선루는 본래 취경루(聚景樓)였다. 사방에 막힘이 없는 누각이라 주변의 아름다운 경치를 한눈에 볼 수 있어 취경루라 했다. 망선루(望仙樓)라는 이름은 조선 세조 때 세도가인 한명회가 바꿔놓은 이름이라고 한다. 원래 망선루가 있던 곳은 지금의 쥬네스 건물 자리이다. 1921년 당시에는 도청 서문에서 서문 대교를 잇는 도로가 큰 도로였다고 한다. 그런데 일본이 이 도로를 확장하면서 망선루의 지붕이 걸린다고 해서 헐어버릴 계획을 세운 것이다. 망선루를 구한 것은 김태희 등 청주청년회의 사람들이었다. 청년들은 모금 운동을 통해 일제로부터 망선루를 사들이고, 자재를 육거리 제일교회로 옮겨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제일교회로 옮겨진 망선루는 이후 민족교육의 산실이 되었다. 해방 후에는 세광중. 고등학교가 이곳에서 처음 문을 열었으며. 청주 YMCA, 청주YWCA도 이곳에서 창립하여 초창기 기반을 닦았다. 청주 지역의 교육과 문화, 청년 여성운동의 산실 역할을 한 것이다.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제일교회 망선루 건물의 훼손이 심각하여 2000년 12월 지금의 중앙공원 자리로 옮겨 복원하게 된 것이다.

문화재는 제자리에 있을 때 그 가치가 더하는 법이다. 망선루의 복원도 원래 위치에 복원하는 것이 최선이지만 원래의 부지를 매입하는데 엄청난 예산이 들기 때문에 본래의 자리로 돌아갈 수 없었다. 중앙공원에 자리를 잡은 것은 청주 동헌이나 충청병마절도사 영문 등의 문화재와도 연결 지을 수 있는 장점이 있어 사람들이 많이 모일 수 있는 곳 등을 고려한 것이다. 

망선루에는 고려 공민왕의 자취가 남아 있다. 홍건적이 개경까지 침입하자 공민왕은 안동까지 피난을 갔는데, 돌아오는 길에 청주에 행궁을 차리고 6개월이나 머물러 있었다. 공민왕은 이때 취경루에서 과거시험을 열고 합격자 명단을 취경루에 붙였다고 한다. 이 과거에서 급제를 한 사람 중에 조선의 개국공신인 정도전이 있다. 망선루를 언제 처음 세웠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고려와 조선을 잇는 천 년 세월을 고스란히 지켜오고 있다. 

청주읍성 안에는 충청도의 육군을 총지휘하는 충청병영이 있다. 충청병영은 지금의 군사령부에 해당하며, 수장은 정 3품인 병마절도사였다. 지방 수령들이 대체로 문신들이었기 때문에 군사적인 지식이나 경험의 부족으로, 전쟁 등의 상황에 효과적으로 대처하기 힘들기 때문에 각 도에 군사를 통솔할 병마절도사를 두었다. 충청병마절도사 병영은 원래 충남 해미현에 있었는데,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후 효종 2년(1651년)에 청주로 옮겨오게 되었다. 임란과 호란 전에는 나라의 수비를 국경에서 한다는 개념이었다. 임란 때 나라의 국경이었던 부산진이 함락되고, 동래성도 하루 만에 함락된 후 20일 만에 한성(서울)까지 왜구에게 함락당하게 된다. 청주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교차하는 군사적 요충지로써 이곳에 병영을 두면, 남쪽에서 올라오는 왜구를 방어해 한성을 지킬 수 있기에 충청병영이 이곳으로 오게 된 것이다. 국경에서 밀리면 임금이 있는 도성까지 함락되는 현실을 본 후, 서울을 수비하기 위해서 국경 말고 중간지점에 방어할 수 있는 곳에 필요함을 깨닫게 된 것이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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