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들의 언덕
양들의 언덕
  • 최 준 <시인>
  • 승인 2014.12.31 19: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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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칼럼-시간의 문 앞에서

최 준 <시인>

양띠 새해에 아는 이들과 인사를 나눴다. 전화로 통화하면서 좀처럼 듣기 어려웠던 자신의 목소리를 들려준 이들도 있지만 대부분이 문자 메시지로 인사를 보내왔다. 나 또한 그들에게 문자 메시지로 엇비슷한 내용의 인사말을 건넸다. 건강과 행복을 기원하고 부자 되라는 흔한 격려의 말이 곧 자신에게 하는 다짐이기도 하다는 걸 확인했다.

‘그래, 새해로구나! 다시 한 해가 시작되었구나!’

메시지 전송 버튼을 누르면서 마음을 다졌으나 아무리 생각해 봐도 삶에 변화를 가져올 만한 새로운 전기가 선뜻 떠오르지 않는다. 올해도 지난해와 별반 다르지 않은 한 해가 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마저 든다. 하기는 해가 바뀌었다고 해서 여태까지 질질거리던 삶이 크게 달라질 게 무엇이 있겠는가.

다들 ‘희망의 새해’를 소망하지만 알고 보면 ‘희망’처럼 막연하고 막막한 말도 세상에는 없는 것 같다.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람은 경험론자가 된다는 게 맞는 말인 듯도 싶다. 지난날을 회상하면서 오늘을 어제처럼 관성적으로 살아가다가 어느 날 자신도 모르게 마감해야 하는 삶. 허망하기 그지없는 노릇이지만 주변을 둘러보면 다들 그렇게 살다가 간다.

살이의 와중에 문득 문득 느끼는 외로움은 이를테면 생존의 부산물 같은 것이다. 새해의 태양이 떠오르는 양떼들의 언덕에 한 마리 양으로 섞여 들어서 그들과 ‘아옹다옹’ 살고 싶다. ‘아옹다옹’은 작고 하찮은 일로 서로 시비하여 다툰다는 뜻이라고 사전에 나와 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 말이 싫지가 않아졌다. 가진 것 없는 이들은 그렇게라도 자신들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게 오히려 낫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옹다옹’이 ‘오손도손’과 자꾸만 오버랩 되었다. 작고한 한 시인은 큰일에는 용기 있게 나서지 못하면서 “작은 일에만 분개하는” 자신에게 분개했지만 큰일은 개인이 아닌 사회와 관련되어 있는 것이니 개인의 힘이 닿지 않는, 개인의 생활권 너머에서나 일어난다.

서민들의 삶은 ‘아옹다옹’의 영역을 좀처럼 벗어나지 못한다. 그러니 이 땅의 서민들이여! 새해에는 ‘아옹다옹’이라도 하면서 살자.

살면서 가족과 이웃과 ‘아옹다옹’도 못한다면 그거야말로 안타까운 노릇이 아닌가. ‘아옹다옹’에서 눈물이 흐르고 슬픔을 나누고 행복도 태어나는 거라고 믿으며 살자.

지금의 당신과 나는 ‘아옹다옹’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다. 고함소리가 아니면 서로의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는 거리에 서 있다.

새해가 왔다고 스마트폰의 문자로만 인사를 나누는 이 재미없는 현실에서 제발 좀 속살거리는 봄비 같은 목소리 좀 듣자.

나를 발견한 당신의 눈빛과 당신의 안부를 묻는 나의 입술이 마주보이는 거리에서 새해를 시작하고 싶다. 그렇게 살아도 당신과 나의 삶은 올 한 해도 넘침보다 모자람이 훨씬 더 많을 게 분명하겠지만 혼자가 아니라는 걸 ‘아옹다옹’으로 서로 확인하는 한 해가 되자.

# 필자 소개
1963년 강원도 정선 출생. 1984년 월간문학 신인상 시 당선. 1990년 문학사상 신인상 시 당선.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 시조 당선. 시집 개, 나 없는 세상에 던진다, 뿔라부안라뚜 해안의 고양이 등. 현재 추계예술대학교 문예창작과에서 시창작 실기 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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