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 역사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1)
청주 역사의 중심에는 무엇이 있을까(1)
  •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4.12.28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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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청주의 도심 한 가운데를 지나다보면 가끔씩 마음의 여유를 갖고 쉬어가도 좋은 공원을 만나게 된다. 우거진 아름드리나무와 새들의 지저귐만으로도 공원을 찾는 이들에게 위안이 되고 휴식처가 되는 곳, 바로 청주의 중앙공원이다. 우리 가까이에 있지만 중앙공원에 의외로 많은 역사와 유적, 그리고 전설이 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중앙공원에 들어서면 동쪽으로 비석들이 나란히 서 있다. 이 비석들은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빼앗긴 청주읍성을 되찾기 위해 싸웠던 조헌과 영규대사 그리고 박춘무의 활약을 추모하는 비석이다. 1592년 8월 의병장 조헌과 승장 영규대사 그리고 박춘무가 이끄는 의병부대가 왜군이 점령하고 있던 청주성을 되찾았던 것이다. 그러니까 임진왜란 때 왜적에게 빼앗긴 읍성을 처음으로 탈환한 것이다. 

1592년 4월 왜군은 조선 침략을 감행했다. 전쟁 경험이 많고 신무기인 조총으로 무장한 왜군은 부산에 상륙하자 거침없이 우리 땅을 침해하고 짓밟았다. 6월에는 평양성까지 점령하고 7월에는 함경도와 두만강까지 나아갔다. 그러나 이순신의 수군에 의해 해상보급이 끊기고 명나라 군대가 참전하였기 때문에 왜군은 거기서 더 나아가지 못했다. 청주성을 점령한 왜군은 20~30명씩 무리로 다니며 사람들을 죽이고 약탈을 자행했다. 청주성이 왜군에게 점령당하자 충청감사 윤선각은 방어사 이옥으로 하여금 관군을 이끌고 청주성을 공격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옥이 지휘하는 관군은 패배만 거듭하다가 조치원으로 물러났다. 이에 윤선각은 영규대사에게 지휘권을 맡겼고 영규대사는 승병과 관군을 이끌고 모충동 고개에 주둔하면서 청주성을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영규대사는 임진왜란 당시 최초로 승병을 일으켰으며, 500여명의 승병을 모아 의병장 조헌과 함께 청주를 수복하였다. 왜군을 공격하기 위해 금산에서 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다가 격전 끝에 조헌 등 700 의사와 함께 순국하여 금산의 칠백의총에 묻혔다. 

칠백의총의 신화를 이룬 조헌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옥천에서 의병 1,700여명을 모아 승병과 힘을 합쳐 청주를 되찾았다. 전라도로 향하는 왜군을 막기 위해 금산전투에서 있는 힘을 다해 싸우다가 의병들과 함께 모두 전사하였다. 

‘청주성 탈환’ 전투 한가운데에는 또 한사람 박춘무가 있다. 그는 700여명이 넘는 의병을 모집하여 청주 부모산성에서 군사훈련을 시켜 청주성을 탈환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전에도 크고 작은 전투에서 왜군들을 물리치기는 했지만 읍성 규모의 빼앗긴 성을 되찾은 것은 청주성이 처음이라는데 큰 의미가 있다. 청주성 탈환 소식은 조선팔도로 빠르게 전파되었고 관군은 물론 의병, 승병들에게 이길 수 있다는 자신감을 안겨 주었다. 전투가 벌어졌던 성문과 성곽은 지금 남아 있지 않다. 그렇지만 중앙공원 한편에 세워진 ‘문열공 중봉 조헌선생 기적비’와 ‘민양공 화천당 박선생 전장 기적비’, ‘의승장 기허당 영규대사 기적비’에는 임진왜란 당시의 치열했던 전투를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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