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남의 단귤
강남의 단귤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12.22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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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풀은 아예 자취를 감추었고, 나무엔 잎 새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은 겨울이 되어야만, 비로소 눈에 띄는 것들이 있는데, 중국 강남 지역에 서식하는 단귤(丹橘)나무도 그런 경우에 속한다. 단귤은 눈과 얼음의 혹한을 견뎌야 하는 송백(松柏)과는 달리 겨울에도 날씨가 비교적 온화한 지역에서 서식하는 특징이 있지만, 그래도 겨울을 견디어 이겨내는 것은 송백(松柏)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 당(唐)의 시인 장구령(張九齡)은 이러한 단귤에게서 세한심(歲寒心)을 읽어냈다.

감우(感遇)

江南有丹橘(강남유단귤) ;강남 땅에 단귤나무 있어
經冬猶綠林(경동유녹림) ;겨울 지나도 여전히 푸른 숲이네
豈伊地氣暖(개이지기난) ;어찌 그 땅이 따뜻해서리요
自有歲寒心(자유세한심) ;스스로 추위 이기는 마음이 있다네
可以荐嘉客(가이천가객) ;반가운 손님에게 돗자리를 깔아 드릴 수 있지만
奈何阻重深(나하조중심) ;가로막음이 무겁고 깊은 것을 어찌하리요
運命惟所遇(운명유소우) ;운명이란 단지 우연히 만나는 것일 뿐
循環不可尋(순환불가심) ;돌고 돌아 억지로 찾지는 못하리
徒言樹桃李(도언수도리) ;부질없이 복숭아와 오얏만 심으라고 말을 하지만
차목개무음(차목개무음) ;이 나무엔들 어찌 쉴만한 그늘 없으리

강남(江南)은 양자강(揚子江) 남쪽 땅이라는 뜻으로, 지금의 소주(蘇州), 항주(杭州) 일대를 일컫는 말이다. 이곳은 중국의 북쪽 지역에 비해 겨울 기온이 높아서, 겨울에도 눈이 오는 날이 거의 없다. 그렇다고 이곳에 겨울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북쪽 땅 만큼 혹독하지는 않지만, 겨울은 겨울이다. 겨울이 오면 이곳에도 나뭇잎이 지고 풀은 모두 시들어 사라지건만, 단귤만은 그렇지가 않다. 겨울 내내 여전히 녹색 숲을 이루고 있는데, 이는 결코 이곳 기후가 따뜻해서가 아니다. 스스로에게 추위를 이겨내는 의지가 있어서 그러한 것이다. 

낯선 땅 강남(江南)에서 불우한 처지가 되어 겨울을 나고 있던 터에, 뜻밖에 만난 단귤은 시인에게 여간 반갑고 귀한 손님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세상은 이 귀한 손님에게 제 대접을 해주지 않는다. 이러한 단귤의 불우한 신세는 영락없이 자신을 닮은 것이기에, 시인은 동병상련(同病相憐)의 정을 강하게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여기서 시인은 문득 운명이라는 것에 대해 생각이 미친다. 

운명이라는 것은 단지 우연히 만나는 것일 뿐이다. 여기저기를 빙빙 돌며 억지로 찾아다닌다고 해서 만나지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든 것이다. 이 생각에는 불우한 현재에 대한 위안과 미래에는 기회를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이 함께 담겨 있다. 그래서 지금 기회를 만나, 득의했다고 해서 도리(桃李)만 심으라고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은 불우하지만 재주만은 도리(桃李) 못지않은 단귤에게도 사람들이 모여서 쉴 만한 그늘이 충분히 있기 때문이다.

겨울을 이겨내는 나무가 송백(松柏)만은 아니다. 비록 비교적 따뜻한 강남(江南) 땅일지라도 겨울은 있게 마련이다. 이곳도 겨울은 이겨내기가 쉽지 않은 계절이다. 이 강남(江南)의 겨울을 묵묵히 견뎌내는 단귤은 불우함에 굴하지 않는 무명(無名)의 절사(節士)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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