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람과 세월에 대하여
바람과 세월에 대하여
  • 김기원 <시인·문화비평가>
  • 승인 2014.12.17 1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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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원의 목요편지

김기원 <시인·문화비평가>
 

바람이 분다. 겨울 칼바람이 앙상한 나뭇가지를 흔들고, 두툼하게 차려입은 행인들의 볼과 귀와 콧잔등을 세차게 헤집는다.

세월이 간다. 봄이 왔는가 싶더니 어느 결에 여름이 왔고, 가을이 왔나 싶더니 어느새 겨울이 왔다.

겨울은 초목들만 옥죄는 것이 아니라, 인간들의 몸과 마음도 옥죈다. 

겨울이 와서 신나는 이들도 없진 않지만, 대다수 서민들은 긴 겨울나기가 고단하고 힘에 부친다. 하물며 돈 없고, 가족 없고, 의지처가 없는 사람들이야 오죽하랴. 하필 엄동설한에 묵은해를 보내고 나이까지 더 먹으니, 바람과 세월이 참으로 얄궂다.

허나 어찌 바람이 겨울에만 불고, 세월이 겨울에만 가리요. 봄에는 겨울을 몰아내는 훈풍이 불고, 여름에는 끈적끈적한 더운 바람이 불다가. 가을에는 더위를 몰아내는 서늘한 바람이 불고, 겨울이 되면 살을 에는 찬바람이 분다. 바람도 화가 나면 때론 아름드리 가로수를 쓰러뜨리는 태풍이 되기도 하고, 비닐하우스를 통째로 날려버리는 거센 회오리가 되기도 한다.

세월도 바람 같아서 계절에 따라 달리 간다. 씨 뿌리는 봄과 열매 거두는 가을은 붙잡으려 해도 빨리 가고, 더운 여름과 추운 겨울은 가라고 보채도 더디게 간다.

인생의 속도는 연륜에 정비례한다. 10대는 시속 10㎞로 가고, 30대는 30㎞로 가고, 60대는 60㎞ 속도로 간다. 이렇게 나이가 들면 들수록 시계추가 빨라지는 것이다. 

바람과 세월은 이란성 쌍둥이다. 바람과 세월은 한순간도 머무름이 없이 지나간다. 센 바람일수록 빨리 지나가고, 질풍노도처럼 살수록 세월은 빨리 지나간다. 

꽃도 사람도 절정기가 있다. 꽃이 만개했다고 바람은 꽃에 머무르지 않는다. 스치고 지나갈 뿐이다. 절정기가 멋지고 아름답다하여 세월은 지체하지 않는다. 그저 찰나일 뿐이다. 꽃이 바람을 잡아둘 수 없듯이, 절정기도 세월을 붙잡아둘 수 없다. 

바람과 세월은 형체가 없다. 거역할 수 없는 에너지가 분명 그 속에 있음에도, 손으로 만지거나 가두어 둘 수 없다. 인간이 바람의 세기를 구분해 바람의 강도를 측정할 뿐, 세월도 인간이 셈법을 만들어 나이의 숫자를 셈할 뿐이다. 어느 누구도,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는 게 바람이고 세월이다. 

바람은 불어라고 있고 세월은 가라고 있으니, 부는 바람과 가는 세월을 어찌 막으랴. 바람이 거세게 불면 풀도 눕듯이, 사람도 세파 앞에선 자세를 낮추어야 한다. 유한한 인생이다. 세월 앞에 장사 없으니 세월에 순응하며 선하게 살아야 한다.

바람과 세월의 다른 점은 돌발성과 항상성이다. 바람은 예고 없이 어느 날 갑자기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돌발성이고, 세월은 늘 누구에게나 한결같이 오고 가는 항상성이다. 돌아보니 과거는 모두 바람처럼 지나갔고, 나이테만 빛바랜 훈장처럼 남아 있다. 

하여 누가 인생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바람 반, 세월 반이라 말하겠다. 바람이 뼛속 깊이 파고드는 송구영신의 시즌이다. 거리에는 추억처럼 크리스마스캐럴이 울려 퍼지고, 구세군 자선냄비가 행인들의 자선을 구애할 것이다.

칼바람 앞에서 그대에게 묻는다. 그대에게 바람은 무엇인가? 그 바람들로 인해 그대가 더 강인해지고 단단해졌다면 그대는 멋진 사람이다. 그대의 지난 세월은 어떠했는가? 고단했어도 의미 있고 살만했다면 그대는 정녕 행복한 사람이다. 어차피 부는 바람 가는 세월이니, 그대여 바람과 세월을 사랑하며 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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