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 값
봉투 값
  •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 승인 2014.12.10 1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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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근 교수의 인문학으로 세상 읽기
정세근 <충북대 철학과 교수>

이 이야기를 들으면 많은 사람이 갸우뚱거릴지도 모른다. 나도 뒤돌아보면서 이럴 수도 있구나하고 생각이 들 정도니 말이다. 직접적인 경험이라서 내 판단의 주요요소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무식과 유식의 차이다. 아울러 내 무식을 고스란히 드러내는 이야기라서 수업시간에 써먹기도 한다. ‘사람이 얼마나 무식할 수 있는가? 무식의 근원은 무엇인가? 따라서 남을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좋은 예가 된다. 지금도 생각하면 정말 창피한 일라서 생각만 떠올려도 얼굴이 붉어진다. 

유럽 1980년 후반이었다. 장학금을 받은 돈을 1년치를 모아 무작정 떠난 배낭여행이었다. 유럽만 하더라도 각 나라가 벌써 환경문제에 신경을 쓰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자연보호’라고는 일찌감치 구호를 잡았지만 그때 자연의 뜻은 ‘산림보호’ 정도의 의미였다. 이를테면 속리산을 넘어가는 말티재 입구에 거대한 ‘자연보호’라는 구호가 거대한 철골구조로 세워져있었다. 그리고는 자연이라는 말이 좀 더 확대되면서, ‘환경보호’라는 구호가 자리를 잡았다. 이때 환경의 뜻은 ‘쓰레기 함부로 버리지 말라’ 정도의 의미였다. 

당시 유럽 여러 나라는 특색 있게 환경문제를 처리하고 있었다. 포도주를 많이 먹는 프랑스는 병을 따로 버리고 있었는데 그게 참 신기했다. 우리는 돈이 되는 병은 가게 방에 가져다주었지만 그렇지 않은 것은 마구 버리던 시절이었다. 그런데 프랑스는 병을 깨버리는 것은 상관없는데, 병을 버리는 데는 따로 있던 것이다. 전날 포도주를 실컷 먹고는 아침에 멀리까지 병을 들고 가서 버려야 했다. 

스위스는 더 엄격해서 색깔별로 병을 모으고 있었다. 우리나라도 분리수거는 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색깔별로 병을 모으지는 않는다. 스위스는 30년 전임에도 ‘하얀색’(투명), ‘갈색’, ‘푸른색’으로 따로 분류했다. 녹여서 다시 쓸 데 편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것과 상관없이 나를 놀라게 한 것이 바로 슈퍼마켓에서 빵조각 등 먹을 것을 샀는데 봉투 값을 내라는 것이었다. 나는 정말 이것이 환경문제 때문에 취해진 조치라는 것을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에게는 ‘그래, 너희들 그렇게 야박하게 살래? 이 나쁜 놈들아!’라고밖에는 인식되지 않았다. 바보 같게도 슈퍼 아줌마랑 봉투 값 때문에 한바탕 싸웠던 기억이 난다. ‘돈이 아무리 좋지만, 봉투 값도 받기냐?’하고.

이제 우리나라에서도 봉투 값을 달라고 하는 것을 당연시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보라. 그것이 십년이 넘은 제도인가하고. 근자의 일이다. 

결국 우리의 인식이라는 것이 이런 한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차이는 문화에 따라 달라질 수 있고, 수준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근래에 미국을 가면 정말 편한 것이 쓰레기 마구 버리는 것이다. 아직 미국은 쓰레기 버릴 땅이 많은지 분리수거에 엄격하지 않다. 쓰레기통에 텔레비전도 버리고 바나나 껍질도 버린다. 편하긴 한데, 수준 있는 대한국인으로서 민망하고 미안하다. 

아파트에 호별로 쓰레기통이 있어 아무거나 마구 버린 시절이 있었다는 이야기를 하면 젊은이들은 다들 놀란다. 꿍꿍 떨어지는 소리에 1층 주민의 민원이 많았다. 그때가 바로 80년대 후반이다. 수준 있고, 인식 있는 시민이 되기 위해 우리도 30년을 기다려야 했던 것이다. 우리는 무엇을 위해 다시 30년을 기다려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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