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은 선택이다
행복은 선택이다
  • 이영숙 <시인>
  • 승인 2014.12.08 19: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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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이영숙 <시인>

한때 대학에서 존폐위기까지 갔던 인문학이 센세이션을 일으키며 화두가 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중세의 신 중심을 전복시키고 르네상스의 인간 본위를 거쳐 과학과 철학의 정점을 이루는 근대를 지나 이성의 꼭짓점에 이르러 돌연 실존에 대한 불안을 느낀 것은 아닐까? 

그동안 우리는 보이지 않는 거시 담론이 돌리는 수레바퀴에서 인간은 보편성의 틀을 갖춘 획일화된 존재가 되어갔고 길든 타자로 살아왔다. 지배 담론의 주체에 의해 해석되는 피사체로 살아온 것이다. 문화의 정점에 이르러서야 인간 이성은 보편성만을 강조하고 특수성을 인정하지 않는 구조적 모순을 성찰하게 되었다. 즉 차이와 다양성을 바라보는 눈이 뜨였다고 할 수 있다. 

감각 또한 그 특성에 맞게 신 중심의 청각에서 인간 중심의 시각으로 오늘날 촉각으로 이동하였다. 요즘 들뢰즈의 단독성이 강조되는 이유도 개인 안의 개별성이 화두가 되는 이유이다. 

그러나 지금 우리가 하는 일은 각자가 잘하는 일이고 좋아하는 일일까? 그것은 선택의 과정에서 확인된다. 자신이 원하는 능동적인 선택보다는 상황을 고려한 불가피한 선택일 확률이 높다. 우리 스스로 자유의지를 거세하고 기정사실이라는 보편적 기준에 들기 위한 경주마로서 달려온 삶이다.

‘우리’라는 단어는 공동체의식을 지향하는 긍정적인 것으로 볼 수 있지만 실은 ‘나’라는 주체가 실종된 상태라 할 수도 있다. 물론 ‘나’만의 쾌락을 우선시하는 것은 아니다. 사회 계약 속에서 허용된 자유, 도덕률 안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 의지를 사장하고 훈련된 민주시민으로 살아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카이로스 삶보다는 수동적이고 물리적인 크로노스 삶으로 살아진 존재, 주체적이고 창조적인 삶을 살지 못한 결과 환경과 상황을 보는 눈이 부정적인 쪽에 더 익숙해진 것은 아닐까? 희망보다는 절망을 보는 관점은 우리에게 삶의 여유가 없기 때문이다. 희망을 보는 눈은 내 안에 있으며 희망의 키워드는 긍정의 선택에 있다.

칼릴 지브란의 『삶의 향기』에서 긍정적인 시냇물과 『귀머거리 뱀과 정상적인 뱀』에서 상황을 바라보는 귀머거리 뱀처럼 긍정적 사고를 지니면 인생은 얼마든지 행복할 수 있다. 행복은 우리 안에 있으며 내 마음의 열쇠에 달렸다. 그렇지 않으면 발터 벤야민의 『산딸기 오믈렛』의 왕처럼 풍요 속의 빈곤과 현실에서의 만족을 모르는 불행한 사람이 된다. 

사노요코의 『백만 번 산 고양이』에서 누구누구의 애완동물로 살던 고양이가 길거리에서 먹이를 찾아야 하는 고단함도 잊고 행복해하는 이유는 주체로 사는 삶을 살았기 때문이다. 길고양이는 긍정적인 선택을 통해 백만 번 다시 태어나지 않을 만큼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인문정신의 사고는 꽃 진자리에 열매 맺는 우주의 질서를 아는 일이고 별이 빛나는 저편에 어둠이 있음을 아는 일이다. 그것이 삶에 대한 성찰이며 다른 주체를 주체로 바라보고 사랑하는 길이다. 주인으로 사는 삶과 노예로 사는 삶은 각자의 마음에 달렸다. 아무리 많은 것을 지녀도 부정하면 불행하고 가진 것이 없어도 긍정하면 행복하다. 행복은 선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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