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주의 파수꾼(4)
청주의 파수꾼(4)
  •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 승인 2014.12.07 1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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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해설사에게 듣는 역사이야기
김영미 <청원군 문화관광 해설사·수필가>

상당산성 안의 부속건물들은 지금은 흔적조차 없지만 기록으로 남아있는 것을 살펴보면 동헌과 운주헌, 폐문루, 사정(射亭),집사청이 있다. 그리고 수첩군관청(守堞軍官廳)과 재가군관청(在家軍官廳), 군기고와 화약고 등이다.

상당산성 고금사적기에 전해져 내려오는 이야기를 보면 성과 관련된 설화가 있다. 신라시대 헌안왕의 서자인 궁예는 태어나면서 이가 나있고 또한 광채가 있어 일관(日官)이 왕에게 그를 죽이라고 했다. 그래서 누각에서 아래로 던지면 유모가 몰래 그를 받기로 했다. 그런데 유모가 아기를 받다가 그만 손가락으로 눈을 찔러 한 쪽 눈이 애꾸가 되었다. 그는 성장하여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어 양길을 만났다. 양길이 동쪽의 전략지에 군사를 나누어 주어 이 도시에 축성하여 살으니 군중이 점점 많아졌다. 

후에 견훤이 거점을 탈취하였는데 견훤은 본래 상주인이다. 견훤은 성장하여 궁예가 난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고 장사 수천인을 거느리고 날마다 주야로 200여리를 걸어와 상당산성을 빼앗았다. 이 이야기는, 처음 궁예가 쌓은 상당산성을 뒤에 견훤이 탈환했고, 끝내 왕건이 차지하게 된 내력을 보여준다. 견훤이 미호천 변에 정북동토성을 쌓고 상당산성에 있을 때의 일이다. 왕건이 상당은 험하여 치는 것이 쉽지 않으니 어떻게 한단 말인가, 하고 물었다. 이에 왕건을 도와 고려를 세운 일등 공신인 복지겸이 묘안을 내놓게 된다. 듣기에 험한 지세를 믿는 자는 패한다 하였는데, 견훤의 병사들은 험한 지세를 믿고 서북을 방비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원컨대 무농정에서 군대를 먹이고 기치를 올려, 남쪽에 군사가 있는 것처럼 꾸민 다음, 정예병을 모아 밤에 서북쪽을 치면 싸우지 않고도 성을 함락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였다.

그래서 복지겸의 계책에 따라 왕건은 견훤을 몰아내고 상당산성을 차지하게 된다. 후삼국의 혼란스러운 정국을 수습한 왕건의 슬기로운 꾀를 강조한 이야기다. 미호문에서 바라보는 서북쪽의 산세와 정북동토성을 바라보노라면, 후삼국의 치열했던 전쟁이 생생하게 그려진다. 특히 풍납토성과 함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정북동토성은 견훤이 창고를 짓고 쌀을 거두어 쌓아두었다가 상당산성으로 운반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지금은 상당산성이 시민들의 쉼터로 또 다른 문화공간으로 거듭나고 있지만, 그 옛날에는 이렇게 전쟁의 함성으로 가득했던 곳이다. 아득한 시간 속에는 백성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기위해 성을 쌓았을 군주도 있었고, 내 나라와 군주를 지키기 위해 어려움을 견디고 피와 땀을 흘렸던 백성도 있었으리라. 상당산성은 그렇게 오랜 세월 청주를 지켜온 파수꾼 같은 방어시설이었다. 그러나 지금은 우리를 안아주고 보듬어주는 고향같은 시민들의 휴식처요, 역사 문화 체험 장소로 시민들의 발길이 끊임없이 이어지는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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