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미생’에 빠지다
드라마 ‘미생’에 빠지다
  •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 승인 2014.12.02 18:1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타임즈 포럼
박상옥 <다정갤러리 대표·시인>

요즘 미생이라는 드라마가 인기입니다. 인기요소인 톱스타도 없고, 별에서 온 그대도 없고 남녀의 사랑이나 이별이나 출생의 비밀도 없습니다. 다만 눈물 꾹꾹 삼키게 만드는 숨 막히는 우리의 현실이 있을 뿐입니다. 스펙도 없고, 명문대 출신도 아닌 신입사원 장그래가 이리 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묵묵하게 견디는가 하면, 직위가 있건 없건 입장에 따라서 부딪치고 망가지는 직장인들이 있을 뿐입니다. 주인공 이름인 ‘그러 는 긍정의 멘트지만, ‘그래그러 라고 내 놓고 말하지 못하는 이력과 사건들과 마주치는 직장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장그래지만, 매회 사건의 주인공은 따로 있고, 장그래는 사건 주변에 어정쩡히 서서 깜냥 것 바둑을 배워 터득한 묘수의 심리를 일에 적용해 봅니다. 검정고시 고졸출신에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컴퓨터 활용능력 하나 밖에 없는, 장그래란 주인공의 시선을 따라가다 보면, 사회의 직장은 먹고 먹히는 정글속이요. 살기 위해 치밀하게 수를 계산해야 하는 바둑판인 것입니다.

‘미생’은 바둑에서 쓰이는 말로 완생의 반대말입니다. 드라마는 미생은 살아남고자 움직이는 돌들에다 살아가기 위해 치열하게 버티는 직장인들을 비유적으로 대비시킨 말입니다. 직장 내 완전히 살아있지 못해서 미생이지만, 결국 세상 모두가 끝나는 그날까지 온전하게 살아남지 않아 미생이라면 미생들이 쏟아내는 대사의 쾌감이 쏠쏠합니다. 스펙이 최고인 풍토를 꼬집는, “뭐라도 하는 게 스펙이 되는 사회잖아. 돈 안 준대도 뭐라도 할 수밖에 없게 사회가 등을 떠밀고 있는 거지.” 전투력 강한 행동대장 같은 유형을 두고는, “성취동기가 강한 사람은 토네이도와 같아서 주변 사람을 힘들게 하거나 피해를 주죠. 하지만 그 중심은 고요하잖아요.” 일의 결전을 앞두고는, “싸움은 기다리는 것부터 시작입니다.” 성과우선주의를 두고는, “보이는 것이 보여 지기 위해 보이지 않는 영역의 희생이 필요한 것이다.”라고 직설합니다. 미생의 나래이션도 철학적입니다. “어쩌면 우린 성공과 실패가 아니라, 죽을 때까지 다가오는 문만 열어가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싶다.” “인생은 끊임없는 반복! 반복에 지치지 않는 자가 성취한다.” “기초 없이 이룬 성취는 단계를 오르는 게 아니라, 성취 후 다시 바닥으로 돌아오게 된다.”

‘미생’은 냉혹한 현실에 던져진 신입의 시선을 통해 바둑과 자본주의의 공통적 생리를 정확히 집어냅니다. 이익이 없는 돌 하나를 버리듯, 이익이 되지 않는 누군가는 쉽게 버려집니다. 내가 잘 나가면 누군가 힘들다는 것이고 경쟁업체가 잘 된다는 것은, 내 이익이 줄어든다는 것입니다. 이익을 내기 위해서라면 직원들에게 폭언도 해야 하고, 살아남기 위해 옳지 않은 것에도 침묵해야 하고, 과거의 을이었던 친구에게 굽실거려야 하고, 이제는 갑이 된 친구에게 을이 되어 이용당해야 합니다. 자존심 따위는 휴지처럼 빨리 버릴수록 마음의 찌꺼기가 없다고 합니다. 스펙 하나 없지만 성실로 무장한 장그래가 낙하산은 무조건 무능하다는 인식을 바꿔 놓습니다. 역설적으로 우리사회가 정직과 성실만으로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을 강력하게 규탄합니다. 미생은 ‘생존’이 화두가 되어버린 우리사회의 탁한 기류를 환기시키는 시원한 드라마. 미생이 인기 있는 이유는 가슴으로 사람을 대하는 장그래 같은 사람이 머리로 상대하는 장백기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지 않은 채, 어떻게든 서로 조화를 이루며 살아야 한다고 조용히 깨닫게 해주는데 있습니다. 미생과 완생 사이의 세상이 너무 넓습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