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과 선조, 종묘의 엇갈린 운명
광해군과 선조, 종묘의 엇갈린 운명
  • 조한필 기자
  • 승인 2014.12.02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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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의 주장
종묘(宗廟)는 조선시대 임금과 왕비의 위패를 모신 곳이다. 추존된 왕과 왕비도 모셔져 있는데 정작 왕위에 오르고도 죽어선 종묘에 못 오른 왕이 있다. 연산군과 광해군. 왕이 됐으나 묘호(廟號)를 받지 못한, 즉 왕이 되지 못한 왕이다.

방탕하고 패륜적 행위를 일삼은 연산군을 그렇다 치고 광해군(1575~1641)은 연민의 정을 느끼게 한다.

게다가 광해군은 임진왜란 때 불탄 종묘를 복원한 이가 아닌가. 자신을 왕에서 물러나게 이유 중 하나가 무리한 공사로 국가 재정을 축낸 것이었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그 혜택을 보지 못했다.

지난 토요일, 친지 결혼식 때문에 서울에 갔다가 종묘를 들렀다. 문화해설사가 “외국인들도 종묘를 재건한 왕이 정작 종묘에 모셔지지 않은 이유에 많은 관심을 갖는다”고 말했다.

1698년 음력 11월 6일, 노산군(단종, 1441~1457)이 죽은 지 241년이 지난 때였다. 숙종은 중신들을 모이게 한 후 노산군의 묘호를 단종(端宗)이라고 정했다. 전 현감 신규가 노산군의 복위와 묘호 추증을 상소한 지 한달여만에 논의를 거쳐 단행된 일이다.

하지만, 광해군은 복권되지 않아 그의 재위기간(1608~1623) 기록이 실록이 아니라 광해군일기로 불리고, 무덤도 왕릉과 달리 동물 석상·무인석 등을 갖추지 못했다.

광해군은 준비된 왕이었다. 1592년 18세 나이에 세자로 책봉됐다. 충주 탄금대의 신립 장군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1552~1608)는 즉각 피난길에 나섰다. 선조는 평양으로 떠나기 전 왕세자를 책봉하라는 신하들 채근에 광해군을 선정한다.

선조는 20여일 후 평양에서 “세자는 훤칠하고 어질고 효성스럽다…왕위를 물려줄 계획은 오래전에 결정했거니와 군국 대권을 총괄토록 하려 했다” 며 광해군에게 전시 조정(分朝)을 맡긴다.

그러면서 자신은 명나라에 요동 땅으로 넘어갈 뜻을 타진한다. 이때부터 비겁한 아버지와 용감한 아들의 전형적 모습이 나타난다. 광해군은 수년간 전장을 누비며 풍찬노숙하며 백성을 격려하고 의병 모집을 독려했다.

이에 명나라조차 선조를 무시하고, 광해군을 칭찬했다. 1595년 3월 명나라는 서찰에 “광해군은 영특하고 총명해 신민들이 복종하니 신하들을 거느리고 전라도, 충청도에 머무르며 방어 책임져라… 부왕의 실패를 만회해 국가가 보존되도록 하라”고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선조의 ‘몽니’가 시작됐다. 1592~1595년에 걸쳐 15번이나 왕위를 광해군에게 넘기겠다며 국면 전환용 ‘선위(禪位) 카드’를 내민다.

40세를 갓 넘긴 왕이 이럴 때 가장 힘든 건 조정 중신과 세자다. 무엇보다 세자가 죽을 지경이다. 식음을 전폐하고 선조 앞에 무릎을 꿇고 “(분부를) 거둬주소서!”를 외쳐야 했다.

전쟁이 끝난 후 1602년 51세의 선조는 19세 인목대비를 맞는다. 4년 후 적장자 영창대군이 태어나고 서자인 광해군의 가슴앓이가 또 시작됐다.

결국 어렵게 왕위에 오른 광해군은 백성이 원하는 대동법을 시행하고, 명·청 교체기를 현명하게 헤쳐나간다.

영화 ‘광해’에서 가짜 광해가 외쳤다. “도대체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요? 그대들이 죽고 못 사는 사대(事大)의 예보다 내 나라, 내 백성이 백 곱절은 소중하오!”

광해군 ‘복권운동’이 학계와 영화계에서 이뤄지는 지금, 그의 위패가 종묘에 오를 날이 올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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