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일 없어 고마워요
별일 없어 고마워요
  • 박명애 <수필가>
  • 승인 2014.12.01 1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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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박명애 <수필가>

우듬지 아름다운 시간이다. 촘촘히 혹은 성글게 펼쳐진 가지는 떨켜들이 만들어 내는 맵시로 우아하다. 노을 고운 겨울날이면 나무에선 막막한 외로움이 풀려나온다. 붉은빛을 등지고 담대하게 뻗어 오른 선들은 뜨거움과 우울함이 뒤섞인 뭐라 말할 수 없는 감정들을 불러내며 마음에 틈을 낸다. 그럴 때 누군가 걸어오는 말은 풍선이 된다. 좋은 말도 어려운 말도 듣기 싫은 말도 바람에 한껏 부풀어 가슴에 복잡한 무늬를 그린다.

오늘은 눈이 내린다. 민들레 홀씨처럼 한 점 두 점 나풀거리더니 눈발이 날린다. 느티나무 우듬지 끝 달강 달강 맺혔던 물방울들이 바람에 흩어지고 금세 하얀 나무가 되었다. 첫눈이 온다고 친구들에게서 수선스레 들어오는 메시지가 반갑다. 늘 같은 말로 시작되고 끝나는 엄마의 전화도 긴 여운으로 남는 건 날씨 탓일까.

‘별일 없냐고. 별일 없다고. 그럼 됐다고. 별일 없으면 고마운 거지.’

되새김 해봐도 참 심심한 대화. 그런데 오늘따라 그 말이 참 따스하게 다가온다.

가끔은 삶이 지루하다는 생각을 했었다. 스스로 밑그림을 그리고 채색하며 사는 인생. 처음 스케치와는 달라진 낯선 그림이 돼가지만 돌아보면 고만고만한 삶이다. 다만 나이가 들어도 허영으로 꿈틀대는 욕망이 숙제일 뿐. 배우면 배울수록 부족함이 늘고 아는 게 많아질수록 불편함이 배가 되곤 하는 게 내 그릇이다 보니 새로운 변화를 꿈꾸며 겪는 갈등이 소소한 것에 감사하던 마음을 잊게 한다. 독서회에서 만나는 책 벗들은 내가 삶에서 흘리고 잃어버린 것들을 찾아주는 고마운 인연들이다. 

언제나 그렇듯 책으로 뜨겁게 공방전이 오간 이야기 끝은 늘 삶 곁으로 돌아와 잠언처럼 끝을 맺는다. 지난주 마무리는 ‘별 일 없다는 사실에 매사 감사한 줄 모르고 푸념이 많다’였다. 늘 같은 날들이 지루하다 투덜댔다 호되게 한방 얻어맞은 셈이다.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 다르지만 평범한 일상에 별 일 없다는 것, 어제와 같은 날들이라는 말은 괜찮다는 말과 통한다. 

올해는 유난히 다사다난한 해였다. 나라 안팎으로 어려운 일들, 아픔을 함께 나눌 별일들이 참 많았다. 자연 재해도 있지만 특히 안타까운 점은 사람의 욕심으로, 부주의로 만든 일들이 끊이지 않아 실망하고 속상했던 기억이다. 정직하지 못한 사람들의 비리로 서로에 대한 신뢰는 추락하고 시한폭탄처럼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이런 와중에 내게 별일 없음에 안도하는 삶이 때론 사치 같고 부끄럽기도 하지만 그래도 가슴 한켠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올해도 어김없이 마무리해야 하는 12월은 오고 또 습관처럼 일 년을 정리해야 한다. 별 일 없어 고맙다고 괜찮았다고 크게 말할 수 있는 내년을 기대한다. 

전화기에는 또 메시지가 들어온다. 눈이 온다고, 첫눈이라고. 여전히 기다리는 소식은 감감하다. 창밖엔 눈보라가 휘몰아치고 있다. 몸이 좋지 않아 서울 간 벗에게 올 소식을 기다리며 눈 내리는 풍경을 물끄러미 내다본다.

‘언니~ 별일 아니래. 나 괜찮대.’ 그랬으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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