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과 술
초겨울과 술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11.24 19: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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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초겨울로 들어서면, 하루가 다르게 날씨가 차가우지고, 서리 내리는 날이 잦아진다. 이에 따라, 들판의 풀들은 까맣게 말라비틀어지고 지고 몇 잎 남지 않은 나뭇잎마저도 모두 떨어지고 만다. 사람들의 마음도 왠지 허전해지고, 무심한 세월 앞에 무력감을 느끼기도 한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외로움과 허전함을 달래주는 친구와 술이다. 당(唐)의 시인 백거이(白居易)는 초겨울의 을씬함을 담담한 어조로 그려내고 있다.

◈ 초겨울, 술은 익어가는데(冬初酒熟)

霜繁脆庭柳(상번취정류) : 서리 자주 내리자 마당의 버들 시들고
風利剪池荷(풍리전지하) : 바람 매서워지자 연못의 연꽃이 베어졌네
月色曉彌苦(월색효미고) : 달빛은 새벽이 되니 더욱 맑고
鳥聲寒更多(조성한경다) : 새소리는 날 차가워지니 더욱 잦아졌네
秋懷久寥(추회구요낙) : 가을 생각은 늘 쓸쓸하고
冬計又如何(동계우여하) : 겨울 생계는 또 어떡해야 하나
一甕新醅酒(일옹신배주) : 한 독 가득 새로 빚은 술이
萍浮春水波(평부춘수파) : 개구리밥풀 떠다니는 봄 연못 물결이로구나


※ 서리 내리는 날이 부쩍 늘어나는가 싶더니, 마당의 버드나무 이파리가 시들어 힘이 없다. 고운 연두빛으로 새봄을 수놓았던 자태며, 헤어진 벗을 떠올리게 하던 운치는 온데간데없다. 서리만 잦아진 것이 아니다. 바람 또한 매섭게 차가워졌다. 그래서 연못 속의 연을 잘라 쓰러뜨리고 말았는데, 그 모습이 마치 날카로운 가위로 잘라낸 것 같았다. 초겨울 바람이 날카로운 가위인 셈이다. 서리와 바람, 이들이 초겨울에 시인의 마당을 찾은 새 손님들이라면, 달과 새는 사시사철 찾아오는 단골손님들이다. 

달은 여느 때처럼 떠올라 있지만, 초겨울 새벽녘의 달빛은 다른 어느 때보다 더욱 맑아진 모습이다. 새소리도 늘 들리던 터였지만, 초겨울이라서 날씨가 차가워지니 그 소리가 부쩍 커졌다. 잦은 서리, 날카로운 가위 같은 바람, 더욱 맑아진 달빛, 부쩍 많아진 새소리에서 시인은 가을이 지나갔음을 직감한다. 이제는 지나가 버린 가을을 생각하면, 쓸쓸한 느낌을 떨칠 수 없다. 그리고 당장 코앞에 닥친 겨울을 무엇을 먹고 무엇을 입고 견뎌내야 할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다. 떠난 가을을 생각하면 쓸쓸하고, 닥칠 겨울을 생각하면 생계가 걱정이고, 이럴 때는 뭐니뭐니해도 술이 최고이다. 마침 시인의 집에는 아직 개봉하지 않은, 새로 빚은 술 한 도가니가 있었는데, 시인은 계제에 이것을 개봉하기로 마음을 먹고, 도가니 뚜껑을 열었다. 그 순간 시인의 눈에는 개구리밥 풀(萍)이 둥둥 떠 있는 봄 연못의 물결이 펼쳐졌다. 막 개봉한 술 독아지 맨 위에서 술이 출렁이는 모습을 표현한 시인의 솜씨가 감탄을 자아내기에 충분하다.

서리가 잦아지고 바람이 날카로운 칼날처럼 느껴지는 초겨울이면, 사람들은 세월 무상을 실감하며 쓸쓸한 감상(感傷)에 빠지기 쉽다. 이럴 때 필요한 것이 술과 친구이다. 술은 취하고자 하는 게 아니고, 친구와의 대화를 위한 방편이다. 친구가 없어서 혼자 마실 때도 술은 취하고자 함이 아니다. 술을 매개로 가상의 친구들과 대화를 하고자 함이다. 정성스레 술을 빚어, 흉금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를 불러서 도란도란 세상 사는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지난가을에 대한 상념도, 곧 닥칠 겨우살이에 대한 근심도 봄눈 녹듯이 사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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