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기의 철학
위기의 철학
  • 양철기 <충북학생외국어교육원 연구사·박사·교육심&
  • 승인 2014.11.20 18: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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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으로 보는 세상만사
양철기 <충북학생외국어교육원 연구사·박사·교육심리>

수시와 수능을 마친 딸은 기가 푹 죽어있다. 예상보다 수능을 잘 보지 못했으며 수시에서도 원하는 대학은 떨어졌다. 아이는 자신이 계획하지 않았던 대학, 전공을 찾아가야 한다. 아이의 삶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위기가 다가왔다. 어떻게 해야 하나…. 

인생은 통계·조작·단계적 체계적일까? 인생은 운명적, 각성, 위기 등을 통한 단속적(斷續的)이고 급진적일까? 지나온 삶을 되돌아보면 이 물음에 대한 답이 나올듯 하다. 현재의 나는 어떻게 현재의 나로 자리 잡고 있는가. ‘만약 그때 그 자리에 가지 않았다면, 그 친구를 만나지 않았다면, 그때 술 취하지 않았다면, 약속시간을 놓쳐 대타로 그 여인을 만나지 않았다면…’ 이러한 운명적인 사건과 위기가 지금의 내가 되게 한 것이다. 

철학자 볼르노(Bollnow)에 따르면 인간은 삶의 일상을 단절시키는 위기·불안·죽음·한계상황·만남과 같은 중대한 운명적 사건들 안에서만 근본적으로 자신의 참된 실존(實存)을 경험할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실존의 자각은 그 이후의 삶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것은 앞과 뒤의 삶을 구분하는 단순한 단절이 아니라 뒤의 새로운 삶의 질서를 위한 토대가 된다. 단절의 순간 안에서 체험된 삶과 사람됨의 본질은 새로운 삶의 출발점이 되고 새로운 존재의 지평이 열리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실존적 사건은 자신의 계획과 노력으로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우연하게 찾아오는 운명적인 사건이라는 것이다. 또한 실존적 사건이 닥쳐오면 그것은 그 사람을 전체적으로 사로잡게 되며 이것은 계획할 수 없고 예정할 수 없지만 인간으로 하여금 결단하게 하고 자신을 변화시키는 계기로 작용한다. 

해리포터의 작가 조앤 롤링(J.Rowling)은 영국의 중산층 집안에서 곱게 자란 모범생이었다. 고등학교때 학생회장을 할 정도로 성적이 우수해서 최고 명문대학인 옥스퍼드에 진학하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영국판 수능 점수가 낮게 나와 어쩔 수 없이 한단계 낮은 엑시터대학교에 진학하게 됐고 전공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할 수 없었다. 마음에 들지 않는 대학과 전공을 하게 된 그녀의 대학생활은 대충 짐작이 갈 것이다. 그녀는 전공과는 관련없는 책 속에 파묻혀 살았으며 괴짜 친구들과 어울려 다니며 우울한 대학시절을 보냈다. 졸업 후 취업도 연애도 잘 안되는 암울한 청춘기를 보냈다. 

그러나 원하는 명문대에 떨어지고 방황한 것이 그녀에게는 삶의 결정적 분기점이 됐다. 롤링이 전 세계인들을 열광시키고 그녀를 재벌로 만들어 준 해리포터를 탄생시킬 수 있었던 것은 열등감 속에서 찌질하게 지냈던 대학시절과 청춘시절에 읽었던 수많은 책과 많은 괴짜 친구들과의 우정을 쌓으며 상상력을 길렀기 때문이다. 

부끄럽지만 고백하고 싶은 것이 있다. 29년전 고3 수험생이었던 나는 어처구니없는 답안지 작성 실수로 학력고사(수능)를 망치게 됐고 원래 가고자 했던 대학을 가지 못했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선택을 해야만 했고 대학시절 내내 ‘내 원래 실력보다 낮은 대학에 다니고 있다’는 열등감에 시달리며 학과공부를 등한시하고 어정쩡한 4년의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실수로 가게 된 대학과 전공이 나에게 딱 맞는 길임을 뒤늦게 깨달았고 지금은 교사로서, 장학사로서의 삶이 행복하고 만족스럽다.

딸 아이를 포함해 입시에 실패했다고 생각하는 이 땅의 모든 고3들. 지금 이 위기상황에서 전혀 예상치 못했던 선택을 해야 하는 우리의 아이들에게 한마디 하고 싶다. 걷다 보면 넘어질 수도 있지 않은가. 넘어지면 등을 대고 하늘을 보자.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새로운 길이 열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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