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공장두레 30주년에 부쳐
예술공장두레 30주년에 부쳐
  • 김기원 <편집위원·문화비평가>
  • 승인 2014.11.17 19:11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충청논단

김기원 <편집위원·문화비평가>

지난 15일 토요일 저녁 청주명암타워에서는 ‘사단법인 예술공장두레(대표 오세란)’ 30주년 기념행사가 조촐하지만 의미 있게 열렸다.

기관·단체나 기업도 아닌 영세한 예술극단 하나가 30년이라는 풍상을 버티며 존재감을 유지해 왔다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상찬받을 만해 기쁜 마음으로 초대에 응했다.

(사)예술공장두레는 1984년 ‘우리 춤 연구회’를 시작으로 진화를 거듭해 지난 30년 동안 ‘삶의 연극, 진실의 연극, 함께하는 연극’을 표방하며 청주를 주 무대로 활동해온 연희예술단체다.

4년 전 어느 여름 해거름에 극단본부가 있는 북이면 야외공연장에 가서 ‘착한 김상봉’이라는 창작마당극을 관람한 적이 있다. 충격이었다. 지역에 뿌리박고 지역민과 호흡하는 우수한 극단이 있다는 것에 감동했고 안도했다. 그리고 미안했다. 한때 충북도 문화예술과장을 지낸바 있고 문화비평가로 활동하면서도 그들에게 해준 게 아무것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행사장에는 도종환 국회의원과 신찬인 충북도 농정국장, 김영주·이광희 도의원, 판화가 이철수 등 낯익은 인사들이 와있었다.

모두들 진심으로 예술공장두레의 창단 30주년을 축하했다.

사실 점잖은 청주 양반골에서 광대를 지향하는 전문극단을 운영한다는 건, 그것도 한해도 거르지 않고 매년 창작 작품을 발표하면서 30년간 무대를 지키기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광대가 마당을 펼쳐도 구경꾼은 없고 막상 사람들이 몰려도 돈이 안 되는 지역예술의 한계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터라 참석자들의 얼굴에는 이런 자부심과 애틋함이 짙게 배 있었다.

이처럼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예술공장두레를 굳건히 지킬 수 있었던 건 오세란이라는 헌신적인 대표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예술공장두레의 30년은 오세란의 고난의 30년이기도 하다. 대회사로 갈음한 그의 춤사위와 눈물이 이를 웅변하고도 남음이 있었고 극단을 떠난 중년의 단원들이 한결같이 오세란 누나라고 부르며 지난날들을 회상하는 걸 봐도 그렇다. 

이철수 화백이 축사에서 지난 30년이 날씬하고 예뻤던 오세란 대표를 저렇게 머리도 하얗게 세게 하고 펑퍼짐하게 변하게 만들었노라고 헌사했듯이 극단을 지키기 위해 사재도 털어야 했고 가족도 제대로 돌보지 못하고 이상과 현실 사이의 갭을 메우고자 고뇌하며 살아온 30년이었을 게다.

때론 생계 때문에 극단을 떠나는 단원들이 안타까워 베갯머리에 눈물도 많이 적셨을 것이다. 그러나 보람도 많았다. 300여 명의 든든한 후원회원이 생겼고, 노동자·농민과 서민들이 잘한다고, 더 잘하라고 쳐준 박수와 응원은 그들에게 훈장이 되었다.

예술공장두레가 2004년 무대에 올린 ‘염쟁이 유씨’는 연극사에 전대미문의 2000여회 공연이라는 금자탑을 세웠다. 그 ‘염쟁이 유씨’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연극인 유순웅씨가 우리나라 최고의 흥행 영화 ‘명량’에서 이순신 장군에게 물때와 물길을 안내하는 노인역으로 나올 만큼 30년이란 세월의 두께는 깊고 단단했다.  

유순웅은 독립해 프리랜서로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지만 많은 단원들이 생계를 감당하지 못해 목숨처럼 사랑했던 춤과 연극을 가슴에 묻어야 했다. 어떤 이는 공무원이 되었고 어떤 이는 스프레이를 만드는 회사의 공장장이 되기도 했다. 그렇게 극단을 떠난 선배들, 후배단원들과 정겨운 해후는 보는 이의 눈시울을 뜨겁게 했다.

이제 ‘숨쉬는 광대’ 를 자처하며 광대무변세상(廣大無變世上)을 만들고자 하는 그들의 순수한 꿈이 이루어지도록 지자체와 지역사회가 나서야 한다. 이 땅의 우수한 무용가와 연극인들이 생활고 때문에 무대를 떠나는 비극만은 없게 하자.

예술공장두레의 30주년은 충북문화예술사의 자랑스러운 족적이자 자양분이다. 더 밝고 힘찬 세상을 만드는 그날까지 (사)예술공장두레는 계속 진화해야 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