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 풍광
초겨울 풍광
  •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 승인 2014.11.10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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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태봉교수의 한시이야기

김태봉 <서원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

늦가을 내지 초겨울이 주는 느낌은 스산함일 것이다. 바람은 한층 더 쌀쌀해지고, 나뭇잎은 거의 다 떨어져 나무들은 초췌한 알몸을 드러낸다. 아스팔트 위를 구르던 낙엽들마저도 이맘때가 되면 누군가에 의해 쓸려나가고 보이지 않는다.

들은 텅 비고, 산은 듬성듬성 빈자리가 드러난다. 까맣게 땅에 말라붙은 풀들 위로 하얗게 서리가 엉기어 있다. 이처럼 초겨울의 풍광들은 한결같이 스산한 느낌을 주지만, 이 와중에도 꽃을 피우고 싹을 틔우는 생명체들도 있다. 송(宋)의 시인 소식(蘇軾)은 초겨울의 스산함 속에서 도리어 생명의 빛을 찾아낸다.
 
◈ 초겨울에 짓다(初冬作)
荷盡已無擎雨蓋(하진이무경우개) : 연꽃 다 떨어져 비 막을 덮개 없고
菊殘猶有傲霜枝(국잔유유오상지) : 국화는 아직 남아 서리 아랑곳하지 않는 가지 있네
一年好景君須記(일년호경군수기) : 한 해의 좋은 경관 그대는 꼭 기억해야 하느니
正是橙黃橘綠時(정시등황귤록시) : 바로 유자가 노랗게 익고 귤나무 푸른 때로구나

※ 연잎은 넓은 잎에도 불구하고 다른 초목에 비해 비교적 늦은 시기까지 시들지 않고 푸름을 유지한다. 이러한 연잎도 초겨울이 되면 어쩔 수 없이 시들어 떨어지고 만다.

시인은 그 넓은 잎으로 비를 가리던 일을 더 이상 못하게 된 것을 아쉬워한다. 아쉬운 것은 이뿐만이 아니다. 아직 서리에 아랑곳하지 않는 가지가 몇 가닥 남아 있긴 하지만, 가을꽃 국화도 거의 본 모습을 찾아보기 어려워졌다. 그야말로 스산한 정경이 아닐 수 없다. 봄꽃이 아무리 고운들, 여름 신록이 아무리 싱그러운들, 가을 낙엽이 아무리 매혹적인들, 초겨울에는 그저 지난 추억에 불과하다. 초겨울은 초겨울의 아름다움이 있고, 그것이야말로 일 년 중 가장 아름다운 정경이라고 시인은 갈파한다.

그러면 시인이 주목한 초겨울의 아름다움을 만들어 주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유자(橙)와 귤이었다. 유자는 영하 9도에서도 견딜 만큼 추위에 강한 식물이라 초겨울에 특유의 노랑 빛으로 열매가 익어 가며, 생생하게 가지에 달려 있곤 한다. 유자는 그 열매가 서리를 맞아야 향기가 성숙할 정도로, 추위를 피하기는커녕, 도리어 반긴다고 할 수 있으니, 과연 초겨울의 진풍경(珍風景)이 아닐 수 없다. 귤(橘)도 사정이 비슷하다. 11월 중순 무렵이 수확 철이니만큼, 초겨울에도 그 잎은 여전히 녹색 빛을 도도하게 간직하고 있다. 이 파란 귤잎 또한 초겨울의 명물이라고 할 수 있다.

연꽃과 국화가 사라져 스산할 것만 같았던 초겨울 풍광이 이 시기에 성숙기를 맞는 유자와 귤 덕분에 생기 차고 환한 모습을 띠게 되는 것이다.

무서리에 온갖 초목이 시들어 말라 버리고 나면, 초겨울의 산야는 그야말로 텅 비고 만다. 이러한 초겨울의 풍광은 사람들로 하여금 스산함을 느끼게 하기에 충분하다.

그렇다고 의기소침하고 있을 수만은 없는 게 우리네 인생살이이다. 스산하면 스산한 대로 그 나름의 매력이 있는 것이다. 그리고 초겨울 추위에 도리어 빛을 발하는 유자와 귤이 있다. 이들로 인해 초겨울은 한 해 중 가장 아름다운 시기라고 한다면 지나친 것일까? 스산함이 만들어 내는 여백에 유자와 귤의 황색과 녹색이 채색되어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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