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홍빛 가을
주홍빛 가을
  • 안희자 <수필가>
  • 승인 2014.11.10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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生의 한가운데
안희자 <수필가>

‘가을’하면 으레 떠오르는 영상은 오색 단풍이지만, 내 마음속에 간직한 가을은 주홍빛 감이다. 화려한 귀금속도, 값비싼 먹을거리도 아닐진대 그것은 나에게 깊은 의미를 준다.

해마다 이맘때면 감나무가지가 내 집에 발을 들이민다. 이때부터 거실 안은 풍성한 가을이 열린다. 벽면에는 탐스런 감들이 가지가 휘어지도록 매달리고 감잎에선 은은한 향기가 퍼진다. 가을볕에 달아오른 얼굴이 불그레하다. 제법 살이 붙어 통통하고 윤기도 흐른다. 마치 주홍빛 저고리에 녹색치마를 입은 새색시처럼 곱고 화사하다.

이런 행복이 어디 있을까. 애쓰지 않고도 거저 얻은 수확의 결실들로 내 집은 풍년을 이뤘다. 한 입 깨물면 맛도 달달하다. 그뿐인가. 자연 그대로가 예술이니 탐스럽게 달려 있는 감은 한 점의 수채화요, 한편의 가을 시다. 시나브로 익어가는 감을 바라보며 차 한 잔 마시면 잠자던 감성도 깨어났다. 이 행복은, 늘 내 곁에 감나무를 가져다 주시는 분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신혼시절, 나는 그 아주머니 댁에 세 들어 살았었다. 우선 남편의 출퇴근이 용이했고, 뜰 안에 감나무가 있어 동네에서도 운치 있고 예쁜 벽돌집이었다. 창을 열면 야트막한 언덕배기에 초록빛 소나무들이 널려있어 한껏 맑은 공기를 마실 수 있었다. 

지금도 주인집 아주머니의 후덕한 인심을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첫아이를 출산하고 병원에서 퇴원하던 날이었다. 어느새 방안은 뜨겁게 달구어졌고 부엌의 큰 들통에선 미역국이 넘치도록 끓고 있었다. 우리를 기다리면서 미역국을 �!慧� 식히기를 여러 번 하셨단다. 나도 모르게 눈가가 뜨거워졌다. 한가한 시간이면 주인집 대청마루에 앉아 담소를 나누며 차도 마셨다. 그러다가 어느 날은 해가 지는 줄도 모르고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은 적도 있다. 언젠가 뜰 앞의 감나무를 바라보며 아주머니가 하던 말씀이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저 감나무가 자라서 붉은 감이 주렁주렁 매달릴 때까지 내 집에서 오래오래 살아야해.”

그 무렵 우리는 남편의 전출로 인해 서울로 이사했다. 그리고 두 번째 아이를 출산했다. 아주머니는 이사를 할 때마다 매번 찾아와 주셨고, 언제나 주홍빛 감나무가지를 안겨 주셨다. 아이들은 홍시가 되어 떨어질라치면 발을 동동 구르기도 했다.

그 후로 인연인지 필연인지 살던 곳 청주로 다시 내려오게 됐고, 우리는 그동안 나누지 못했던 회포를 풀었다. 이젠 아주머니는 반백의 노인이 되었고, 희고 고왔던 얼굴은 골 깊은 주름으로 덮혀 있었다. 더 많이 변해버린 것은 어린 감나무가 우람한 거목이 되어 앞마당을 버티고 서 있던 것이다. 아주머니의 후한 인정만큼이나.

얼마 전 아쉬운 전갈을 받았다. 넓은 주택이 힘에 겨워 아파트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정으로 얽힌 때깔 고운 그 감을 언제 또 볼 수 있을까 생각하니 주홍빛 감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세상살이가 이렇게 훈훈하고 아름답다면 좋겠다. 그래서 만나는 사람마다 정겨운 감나무 이야기로 꽃을 피울 수 있으리라. 11월의 가을은 더 깊어지고, 내 마음도 주홍빛 감처럼 붉게 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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