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 때문에 3만명 희생?” LA 김태환 회장 ‘한국전쟁’ 충격 증언
“이승만 때문에 3만명 희생?” LA 김태환 회장 ‘한국전쟁’ 충격 증언
  • 뉴시스 기자
  • 승인 2014.11.10 1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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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 후 하와이행도 미국 정부 기획”
초대 대통령 이승만의 ‘영웅적 결단’으로 평가되는 휴전 직전 반공포로 석방으로 3만 명이 넘는 아군 젊은이들이 추가 희생됐다는 충격적인 주장이 제기됐다.

로스앤젤레스의 언론인 김태환 남가주한인 하버드 동창회장은 9일 뉴시스와의 인터뷰에서 “휴전 직전 한국전쟁의 역사에서 그동안 철저히 숨겨진 진실을 후대가 알아야 한다”면서 “이승만 박사의 반공 포로 석방은 ‘영웅적인 쾌거’가 아니라 정치적 쇼”라고 비난했다.

그는 “이승만 박사의 반공 포로 석방(1953년 6월18일) 열흘 전에 이미 연합군과 공산군은 포로 송환을 포로들의 자유 의사에 따르기로 합의했었다”며 미군이 관리하는 포로수용소에 있던 7604명이 7월27일 휴전 성립 후에 자유 의사에 따라 남측으로 귀환한 자료를 제시했다.

김태환 회장은 “어차피 석방될 반공 포로들을 놓고 꼼수를 부린 것은 중공군의 ‘6월 공세’로 많은 인명이 희생되고 영토가 손실되자 이를 묻어버리기 위한 언론 플레이였다”라고 주장했다. 나아가 반공 포로 석방으로 휴전을 무산시켜 ‘북진통일’의 명분을 쌓으려 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주장은 최근 발간된 ‘Korean Vision(한민족 비전)’ 제8호에 관련 자료들과 함께 상세히 실려 있다.

한국전쟁의 휴전 가능성은 유엔군과 한국군이 인민군을 압록강까지 퇴각시킨 1950년 11월부터 거론됐다. 중공군의 개입 이후 일진일퇴의 공방이 벌어진 1951년 6월 소련의 공식적인 휴전안이 제기됐다. 그러나 북한을 완전 제거하고 통일 대통령이 되겠다는 야심을 품은 이승만 전 대통령이 휴전에 강력 반대해 불필요한 인명손실이 너무 많았다는 것이다.

안타깝게도 가장 큰 인명 손실은 휴전협정이 이뤄지기 전 한 달여 동안 발생했다. 이른바 중공군의 ‘6월 공세’와 ‘7월 대공세’ 때문이었다. 중공군은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협정에 반대하는 이승만의 기를 꺾기 위해 6월10일부터 17일까지 한국군 2군단(군단장 정일권 장군)이 단독으로 방어하는 중부전선 금성 돌출부( Kumsong Salient)에 대공세를 벌였다.

아군은 총 13㎞의 전선에서 평균 4㎞씩 물러나는 패퇴를 당했고 단독 북진을 외치던 이승만 대통령의 체면도 여지없이 뭉개졌다. 김태환씨는 “노회한 이승만 박사는 서방식 언론플레이에 능해 패전 다음날 (휴전 성립 시 발표될) 반공포로 석방이라는 핵폭탄급 뉴스를 제공해 중공군의 승전보를 무색하게 만들었다. 그래서 혹자는 중공군의 6월 공세를 ‘묻혀버린 승리’라고도 말한다”고 덧붙였다.

반공 포로 석방은 중공군의 ‘7월 대공세’라는 더 큰 비극을 초래했다. 중공군은 더이상 ‘단독 북진’을 입에 올리지 못하도록 ‘6월 공세’ 때 이미 타격을 준 금성천 돌출부를 지도상에서 완전히 밀어버리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운명의 7월13일 밤, 중공군은 1950년 11월 한국전 개입 이래 최대의 포 사격을 가한 후에 아군 후방으로 침투해 왔다. 한국군은 수도사단 부사단장이 포로가 되는 등 최악의 참패를 당했고 금성 돌출부는 완전히 일직선이 되어 사라져버렸다. 전투가 소강 상태가 된 7월20일 31㎞의 전선에 걸쳐 아군 영토는 평균 4㎞ 남쪽으로 내려왔다.

김태환 회장은 “어처구니없는 것은 금성천 전투 수기나 회고록을 보면 아군의 피해는 거의 없고 오히려 대승한 것처럼 포장하는 등 사실을 호도하고 있다는 것”이라며 관련 증언 등을 공개했다.

“인해전술로 물밀 듯이 밀고 오는 적을 100여 명의 중대원이 막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결국 김교술 대위와 중대원들은 이 전투에서 6명을 제외한 전원이 전사했다.” “나는 수도사단에서 금성천 전투에서 살아남은 사람이다. 우리 사단은 1953.7.13일부터 휴전이 될때까지 3분의 1 정도가 전사했다. 부사단장 포로, 기갑연대장 전사, 3대대장 전사, 우리 3대대는 몇 명 안 남을 정도로 전사 아니면 포로가 되어 고통과 피해는 말로 다 표현할 수 없고 기억조차 하기싫다.” <이상 ‘통일행 열차 철마는 달리고 싶다’ 발췌>

정전협정일인 7월27일을 불과 2주도 안 남기고 벌어진 참화였다. 김태환 회장은 “휴전협정이 미뤄지면서 6월과 7월에만 5만3000여명의 아군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말했다.

◆ 아군사상자 수 국방부와 미군 기록 왜 다른가

주목할 만한 것은 이 기간 국방부의 공식 전사상자 숫자와 미군측 공식 기록이 큰 차이가 있다는 사실이다. 김태환 회장은 “미8군사령부 월간 보고서엔 1953년 7월엔 아군 전사상자(Casualties)가 2만9629명으로 나와 있는데 우리 국방부의 공식 전사 기록에는 2689명이라고 돼 있다”고 지적했다.

그는 “미군이 한국군 피해 상황을 사실보다 더 과장해서 집계했을 가능성은 없다”면서 “공산군 피해는 ‘추산(Est.)’이라는 표현이 있지만 한국군 숫자는 정확히 보고받은대로 올렸기 때문에 그런 표현이 없다”고 말했다.

미군측에 따르면 이 박사의 반공 포로 석방 때(1953년 6월18일)부터 휴전 조인 때(1953년 7월27일)까지 약 5주 간 미군 피해가 5000여명으로 집계됐다. 당시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의 만용으로 죽지 않아도 될 많은 젊은이들이 희생됐다’며 분노와 반감을 갖게 되었다는 후문이다.

결국 미군 피해자를 빼면 국군 사상자 수는 대략 2만4000여명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측 기록에는 사망자만 3000여 명이라고만 기재돼 있다. 김 회장은 “또 어느 기록엔 부상자 수가 7569 명으로 나와 있는데, 그렇다면 최소한 1만4000여 명이 공중에 떠 있다. 국방부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했다.

휴전협정의 당사자인 클라크 유엔군 사령관은 훗날 중공군의 7·13대공세를 되돌아보며 의미심장한 논평을 남겼다.

“제 생각으로는 중공군이 (7·13 최종) 공세를 벌인 중요한 이유 중의 하나는 한국군을 코피가 터지게 만들어 ‘북진’이 그렇게 쉬운 것이 아니라는 점을 한국과 전 세계에 알려주려고 한 것 같다.” <‘챕터21 마지막 공격’ 478쪽에서>

김태환 회장은 “결론적으로 이승만 박사의 반공 포로 석방은 죄없는 우리 장병들을 도살장에 몰아넣은 셈”이라며 “휴전만 방해하지 않았어도 젊은 병사들이 아까운 청춘을 잃지 않고 고향에 돌아가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거듭 안타까워 했다.

1953년 6월과 7월 아군의 사상자는 각각 2만3161명과 2만9629명이었고 같은 기간 공산군은 3만6346명과 7만2112명으로 나타났다.

그는 이승만 박사가 훗날 4·19 혁명으로 하야 후 하와이로 가는 과정에도 역사의 진실이 가려 있다고 주장했다. ‘이승만을 권좌에서 끌어내린 것은 학생들이지만 그를 하와이에 보낸 것은 미국 정부의 기획’이라는 것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이승만이 독재를 강화하자 4·19 전 해인 1959년 여름 월터 저드 하원의원을 비밀특사로 보내 ‘후계자를 선정하고 은퇴할 것’을 종용했으나 거부됐다. 외교문서에도 나타나지 않은 이 같은 비화는 김태환 회장이 미 대사관 직원이었던 윌리엄 와츠 회견기에서 처음 발굴한 것이다.

4·19가 일어나자, 미국 정부는 주한 부대사 마샬 그린이 기획하고 월터 맥코너기 대사가 앞장 선 모종의 시나리오를 실행에 옮겼다. 이승만이 하야 후 이화장에서 재기를 노린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미 정부는 CIA 비행기에 태워 하와이로 보냈다는 것이다.

김 회장은 “이 일로 마샬 그린 부대사는 미 국무성 내에서 ‘쿠데타 마스터(CoupMaster)’로 명성을 날리게 됐다”면서 “이승만 박사가 국민이 원해서 하야하고 하와이 교포 친지들이 성금을 마련해 전세기로 휴양차 모셔갔다는 공식 발표와는 사뭇 다른 역사적 사실”이라고 강조했다.

김태환 회장은 경기고와 서울대 문리대를 졸업하고 서울대대학원 외교학과 1년을 수료한 후 코리아헤럴드 기자, 남북회담 사무국 외신담당관을 역임하며 1970년대 평양서 열린 적십자사 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했다.

도미 후 미 육군에서 컴퓨터 오퍼레이터로 근무하며 파예트빌스테이트 대학(회계학)과 하버드 비즈니스스쿨(MBA)을 졸업했다. 이후 GM과 크라이슬러에서 재무 전문가로 활약했고 현재 언론 활동과 남가주한인하버드동창회장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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