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들 가슴에 영원할 조성훈 님 영전에
우리들 가슴에 영원할 조성훈 님 영전에
  • 박영수 <수필가·딩아돌하문예원 이사장>
  • 승인 2014.11.09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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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박영수 <수필가·딩아돌하문예원 이사장>

조성훈형, 나라와 사회에 어려운 일이 많은 이때, 어찌 이리도 황망히 길을 재촉하시오? 물억새 하얀 물결로 일렁이는 무심천에서 올려다본 하늘뜨락에 한발 먼저 간 수암 우영, 소석 이상훈형이 어서 오라고 손짓이라도 하던가요. 두어 달전, 발로 뛰어 유치한 세광고 우정학사 첫삽을 뜨며 흐뭇한 미소를 날리던 이사장께서 준공의 날도 기다리지 못하고 어찌 눈을 감는다는 말입니까. 

제겐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아 있었나 봅니다. 지난 1월, 입원 사실을 함구한 탓에 한달도 넘은 후에야 수술 사실을 알고 달려간 서울의 어느 병원에서, 얼굴을 알아볼 수 없도록 야위어 버린 형의 몰골을 보자 눈물이 펑펑 쏟아지더니, 엊그제 붉은 산 가을 노을이 되어 마지막 숨을 몰아쉬던 임종의 순간을 지켜보다 그만 울음보가 터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려. 그만큼 얽힌 인연이 깊기도 하고 형이 내 마음속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돌이켜 보면 꿈 많던 우암캠퍼스 재학시절 형이 흥사단에 입단식 하던 날, 첫눈에 반해 곧바로 마음을 나누는 친구가 되어버렸죠. 형은 일찍부터 사람을 잡아당기는 매력이 있었나 봅니다그려. 어찌 나뿐일까요, 형과 인연이 닿은 모든 분들이 그러할 것입니다.

졸업 후 한때는 모교에서 함께 근무도 했지만, 형은 곧바로 적십자 활동에 몸담아 청소년과장, 사무국장을 거치며 성숙한 문화사회 운동의 선봉에서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죠. 이러한 형을 생각할 때마다 저는 역사적 인물 두사람과 만나게 됩니다. 바로 자주독립의 화신 같은 흥사단 창시자 도산 안창호 선생, 그리고 적십자 운동의 창시자 앙리 듀낭입니다. 그 흥사단의 무실역행(務實力行)과 적십자의 봉사정신이 자연스레 조성훈형 삶의 좌표가 되었고, 도산과 듀낭의 신봉자가 되었던 것입니다. 

얼마전 형은 듀낭이 늙어 병이 들자 어느 양로원으로 자취를 감추고 살았던 이야기를 감동적으로 들려주며, ‘늙은이’를 ‘늘 그이’, ‘늘 그리운 이’로 멋지게 풀이하는 재치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러고 보면 형은 고희를 넘긴 후에도 ‘늘 그리운 이’가 되어 아름다운 노년을 가꾸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형은 독실한 기독교인으로 우암교회 장로, 청주YMCA 이사장, 충북적십자사 회장을 역임하시며, 지역사회에 사랑과 봉사를 시민운동으로 승화시키는 일에 앞장섰고, 생이 다하는 날까지 충북사회복지개발회장, 한국청소년 화랑단연맹 회장, 세광학원 이사장, 청석학원설립자 현양사업회장을 맡아 복음을 전파하며 흥사단, 적십자의 나눔과 봉사정신 구현에 헌신 진력하셨습니다. 

이처럼 줄곧 무보수 봉사단체 일을 맡아 오면서 한때는 국회의원과 시장 선거에 나선 적이 있고, 충청북도의회 의장과 정무부지사를 역임한 바 있습니다만, 친구들이 보기에는 정직하고 순수하기만 한 형의 적성에 맞지 않는 곳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형은 결혼식 주례를 남녀 평등사회 구현 운동의 일환으로 생각하고 주례말씀 첫머리에 “신랑과 신부는 지성과 인격으로 만났으니 서로 존중하고 배려하며 평등한 부부로서 살아가 달라”고 당부하셨고, 시민강좌를 할 때는 “진리는 불변이나 그 구현방식은 시대에 따라 달라져야 한다”며, 전통적 윤리관을 오늘에 맞게 고쳐가며 지켜갈 것을 강조하셨습니다. 또 언제 어디서고 어려운 이웃을 보듬으며 ‘더불어 사는 사회’를 역설하셨습니다.

영정 앞에서 우리 모두가 마음 깊이 새겨 계승해 나가야 할 값진 가르침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름처럼 성실하고 훈훈했던 정(情)의 사람 조성훈형이시어, 형의 긍정과 소통, 지역 사랑 정신 후배들이 이어 갈 것입니다. 이제 무거웠던 짐 다 내려놓으시고 하나님 나라에서 영생을 누리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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