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자유를 만나다
길에서 자유를 만나다
  • 임성재 기자
  • 승인 2014.11.04 19: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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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논단
임성재 <프리랜서 기자>

길을 나선지 33일 만에 집으로 돌아왔습니다. 집을 나설 때 푸르렀던 잔디가 누렇게 변했고, 앞산은 단풍으로 붉게 물들었습니다. 두 계절이 지나간 듯합니다. 그동안 380킬로미터를 걸었습니다. 19일을 걸었고, 중간 중간 5일을 쉬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기간은 진도 팽목항에서 보냈습니다. 시작할 때 목표로 삼았던 하루 평균 20킬로미터를 걸은 셈입니다. 길을 나설 때는‘잘 해낼 수 있을까’, ‘하다 그만두게 되면 어쩌지’하며 머릿속에 걱정이 가득 했었는데 일정을 모두 마치고 돌아오는 차 안에서 또 다시 길을 나설 생각에 빠진 나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처음 걷기를 계획했을 때는 나름의 목적이 있었습니다. 내 마음 속에, 머릿속에 가득한 세상살이의 욕망을 비우고 그 공간을 깨끗한 여백으로 남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여백에는 소박하지만 의미 있는 희망이라는 색깔을 가득 채우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환상이었습니다. 걸으면서 무엇인가를 얻어야겠다는 목적을 가졌다는 것, 그 생각 자체가 또 다른 욕망이었습니다. 희망이라는 단어도 욕망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걷기는 그저 걷기일 뿐입니다. 인간의 호흡과 일치하는 가장 원초적인 움직임 입니다. 

걷기는 느림입니다. 자동차로 1시간이면 갈 거리를 3~4일 동안 걸어야 갈 수 있습니다. 자동차로 6시간이면 넉넉하게 갈 거리를 20일을 넘게 걸었으니 엄청난 비효율입니다. 그렇다고 이 느림이 무한히 불편한 것은 아닙니다. 그동안 스치듯 지나갔던 풍광들을 세밀화처럼 환히 들여다보게 됩니다. 추상화처럼 뭉뚱그려졌던 생각의 편린과 기억들이 또렷한 영사기 화면처럼 되살아납니다. 속도에서 멀어지므로 해서 갇혀있던 시간과 공간에서 내가 해방되는 것입니다. 

걷기는 비움입니다. 겸손함입니다. 두 다리만 있으면 됩니다. 한 다리를 앞으로 내밀면 뒷다리가 따라오고 다시 그 뒷다리가 앞으로 나가면 앞에 섰던 다리가 따라오는 과정의 반복입니다. 오직 땅을 디디고 선 두 다리에 의지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도구도 요령도 필요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여기에 인간의 욕망이 더해져 의류와 신발 그리고 장비가 개발되면서 걷기는 트레킹이 되고, 인간의 호흡과 일치하던 발걸음은 빨라져 가쁜 숨을 몰아쉬게 되면서 스포츠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내려놓고 비워 낼 때 비로소 걷기가 되는 것입니다. 

걷기는 자유입니다. 그저 가벼운 산책만 해도 멈춤의 자유를 얻게 됩니다. 이런저런 걱정거리를 안겨주는 부담을 덜고 잠시나마 일을 잊을 수 있는 것입니다. 먼 길을 며칠씩 걷다보면 일탈의 움직임이 훨씬 더 강해져 일의 속박에서 해방되고, 일의 습관에서 벗어나고 습관의 굴레에서 해방되는 것입니다.(프레데리크 그로/ 걷기, 두발로 사유하는 철학, p13) 그런데 걷기에서 얻는 자유는 이렇게 일상에서 벗어나는 소박한 자유만이 아닙니다. 하루 이틀 걷기를 되풀이하던 어느 날, 갑자기 내 존재에 대한 의문이 생겼습니다. 누구의 아들로, 남편으로, 아버지로, 상사로, 선배로, 후배로 역할과 책임만으로 규정지어졌던 나는 누구일까 하는 의문 말입니다. 지금도 과거의 직책과 현재의 직책으로 함께 불리고 있는 나에게서 그 직책을 빼버리면 나는 어떤 존재일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혀 길을 걸었습니다. 그러다가 문득 나에게서 역할과 책임을 벗겨 냈을 때 남는 한줌도 안 되는 바람처럼 가벼운 존재가 내 모습이며 진정으로 자유로운 존재가 아닐까 하는 생각에 닿았습니다. 

몇 벌의 옷과 간단한 식사도구를 배낭에 담아 끌고 메고 걸으면서 처음으로 자연과 민낯으로 만나보고 느끼는 발걸음은 진정한 나와의 만남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세상에 태어나 처음으로 만난 무한한 자유의 시간이었습니다. 이번 걷기에서 얻고자 했던 것이 바로 욕망에서 벗어난 이 자유가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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